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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칼럼] 미국을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나라

입력 2016-11-09 17:44:36 | 수정 2016-11-10 04:18:34 | 지면정보 2016-11-10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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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우선주의 기치 내건 트럼프 당선은 미국의 정치혁명
미국 새 정부에 대응할 외교정책 발등의 불로 떨어졌는데 한국은 무정부 상황
트럼프를 제대로 아는 한국인은 프로골퍼 최경주뿐이라는 말까지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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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뉴욕 맨해튼 5번가 한복판에 서서 아무나 쏴도, 유권자들은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을 때 귀담아 들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다수가 “말도 안 되는 허풍”으로 받아넘겼다. 하지만 그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트럼프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건, 성차별 발언을 하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통계를 들이대며 자유무역을 공격하건, 지지자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표를 몰아줬다.

‘대이변’으로 불리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놓고 가장 먼저 당황한 건 미국 주류 언론들이었다. 뉴욕타임스는 개표 직후부터 트럼프가 앞서가기 시작하자 ‘stunning upset(깜짝 놀랄 예상 밖의 승리)’이라는 말로 당혹감을 표현했다. upset이라는 단어에는 ‘예기치 않게 혼란스러운 상황, 곤경’이라는 뜻도 있다. ‘Hillary Clinton for President(클린턴을 대통령으로)’라는 사설을 쓸 정도로 대놓고 힐러리를 지지했으니 곤혹스러워할 만도 했다.

트럼프가 ‘주류’들의 이런 예측을 깨부순 요인이 뭘까. 애런 제임스 UC어바인 교수가 쓴 《또라이 트럼프(ASSHOLES: A THEORY OF DONALD TRUMP)》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의 어떤 실수도 쉽게 용서한다. 그만이 처치 곤란한 철면피들로 꽉 찬 정치판의 질서를 바로잡을 힘이기 때문이다. 그가 익살꾼을 벗어나 대중선동가로 변신했고, 허풍쟁이이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지지자들이 멍청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부패한 정치판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정치문외한(outsider)이 필요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선택했다.” 그의 진단대로, 미국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대변되는 ‘부패하고 닳아빠진 기성 정치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정치초보 막말꾼’을 선택하는 ‘도박’을 했다.

미국인들에게는 정치혁명이지만, 한국은 국가 생존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두 달 뒤면 ‘이민 통제’ ‘해외 군비 감축’ ‘일자리를 위한 보호무역 실시’ 등을 공약으로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다. 미군 주둔비용을 한국이 부담해야 하고,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는 그의 정책노선에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 것인지가 당장의 과제로 떠올랐다. 앞날이 녹록지 않을 것임은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지자 주가와 원화값이 곤두박질친 데서도 드러난다.

답답한 것은 한국의 현실이다. 대미 관계를 전면 재점검하고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를 헤쳐 나갈 외교정책 수립이 발등의 불로 닥쳤는데, 정부는 식물상태에 빠져 있고 정치권은 권력다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국이 무섭게 변하고 있고, 세계가 급변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정치·외교 엘리트들은 그런 현실에 까막눈인 게 현실이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미국의 보수주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에서 3년간 근무를 마치고 난 뒤 쓴 책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국은 미국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카드이다. 역사상 미국은 한국을 세 번 배신했다. 첫 번째 배신은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조선을 포커 판의 칩처럼 주고받았다. 두 번째는 2차대전 뒤 한반도를 분단시켰고, 세 번째 배신은 1950년 1월 난데없는 에치슨라인 선포다. 한국전쟁에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의 미국 정부가 한국을 버리는 네 번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설마~”와 “어떻게 되겠지”의 우물안 아마추어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다. “한국에서 트럼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프로골퍼 최경주뿐일 것임. 농담 아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무렵 워싱턴의 국제기구에서 오래 근무한 경제부처 공무원이 보내온 문자메시지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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