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연산군 시대 봉보부인 최씨와 '최순실 게이트'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 자녀가 태어나면 젖을 먹이는 유모를 뒀다. 유모는 어린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접촉하는 사람으로, 초기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선발을 엄격하게 했다. 좋은 유모란 젖이 많이 나오고 말수가 적으며 후덕(厚德)한 사람이어야 했다. 말이 많으면 내실이 없기 때문이고 유모의 후덕한 성품은 따라서 배우라는 의미였다.

조선 왕실에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면 역시 유모를 뒀고 국왕의 유모는 종1품 봉보부인(奉保夫人)으로 봉해졌다.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가 정2품이었으므로 봉보부인은 장관보다 높은 자리였다. 또 봉보부인이 천인이라면 양인으로 올려줬고, 그의 남편은 관리로 임명될 수 있었다. 봉보부인은 결정적인 특권을 가졌다. 국왕이 목욕할 때 지존의 몸에 직접 손대는 사람이 봉보부인이었다. 국왕을 어릴 때부터 길러온 유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봉보부인은 궁궐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연산군에게는 최씨라는 유모가 있었다. 일곱 살에 모친을 잃은 연산군은 최씨에게 각별한 정을 느꼈다. 연산군의 모친은 성종의 계비이던 폐비 윤씨였다. 왕이 된 연산군은 최씨를 봉보부인에 봉하고 7명의 노비를 하사했으며, 최씨의 친척 62명을 천인에서 양인으로 올려줬다. 봉보부인의 천인 친척을 양인으로 삼은 것은 선례가 있었다. 예종은 봉보부인의 4촌, 성종은 봉보부인의 형제까지 양인으로 만들었다. 연산군의 조치는 봉보부인의 6촌까지 대상이 되고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하들이 반대하자 연산군이 말했다. “사람의 형체는 하늘에서 받지만 보양(保養)의 공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나는 유모의 공이 아니라면 오늘이 있을 수 없다.” “젖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면 대를 잇지 못한다. 대를 잇지 못하면 종묘사직이 보전될 수 있는가.”

노비를 하사하라는 명령이 나오자 최씨가 물의를 일으켰다. 자신이 원하는 노비 명단을 국왕에게 직접 전달했고 관청 소속이 아니라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가 포함돼 있었다. 최씨가 담당 관청의 처리를 따르지 않고 미리 국왕에게 명단을 올린 것도 문제였지만 천인 출신인 최씨에게 자기 노비를 빼앗기게 된 관리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들은 봉보부인이 노비를 골라서 데려가면 따라간 노비들은 자기 주인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풍속이 문란해진다고 반발했다.

연산군의 시대였지만 직언을 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주로 언론을 담당한 삼사의 관리들이 나섰고,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던 표연말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국왕이 유모를 우대하는 것이 지나치고 절도가 없으니 유모가 반드시 교만하고 방자해질 것이다. 그러면 세력을 넘보는 무리가 유모에게 달라붙어 벼슬을 팔고 옥사에 간여하면서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이고, 결국은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계속되는 관리들의 직언은 효과가 있었다. 연산군은 봉보부인의 작첩을 한 번 거둬들였다가 돌려줬고, 양인으로 올려주는 친척들의 범위도 좁혔다. 연산군은 최씨의 작첩을 거두면서 ‘봉보부인이 나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일을 꾸미며 국가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최씨가 위독해지자 그의 아들과 사위를 관리로 임명하는 것으로 위로했고, 최씨가 사망한 뒤에도 1년 동안 녹봉을 계속 지급하는 혜택을 줬다.

박근혜 대통령을 ‘언니’라 부르는 최씨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지만, 표연말처럼 직언을 했다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관료들은 연산군 시대만도 못한 것인가.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