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보수의 종언
박근혜 대통령이 직면한 정치적 위기는 그대로 한국 보수의 위기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사분오열적인 보수의 맨 얼굴 말이다. 보수의 위기는 지력의 고갈과 도덕의 파탄이 그 본질이다. 새누리당 일각에서조차 대통령 하야나 탄핵, 혹은 거국내각을 거론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가 어중이떠중이 배덕자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아니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와 자기책임을 골격으로 하는 진정한 보수였던 적이 없다. 어쩌다 특정 지역에서 정치를 시작한 탓에 새누리당 간판 뒤에 몸을 의탁해온 것이다.

새누리라는 당명부터가 그렇다. 새누리당은 영어나 한자 이름이 없다. 그래서 발음을 따라 ‘saenuri’라고 쓴다. 일본에서는 ‘신천지’라고 번역한다.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new world party’다. 이는 남미형 좌익혁명 정당의 이름이다. 새누리당 핵심 인물들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김무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차’를 강조하고 있고, 유승민의 영업 표지는 ‘사회적 경제’다. 정진석 원내대표의 지난 국회 개원 연설은 심하게 좌익적이었다. 남경필 원희룡 등은 좌편향 시류를 따를 뿐 정치 이념이랄 것이 없다. 중견 정치인 중에는 홍준표 김문수 정우택 정도가 보수, 혹은 우익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당내 소수파다. 기회주의자 연맹이 그들에겐 절대로 기회를 주지 않는다. 김진태 같은 젊은 보수가 있지만 당을 혁신할 비전도 의욕도 없다. 지금 친박이 밀고 있다는 반기문은 국제파 환경주의 좌익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는 곧 배신을 때릴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7년이다. 인고의 시간을 살아온 박근혜는 ‘리더 부재’였던 보수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끌려나왔다. 그게 박근혜 스토리의 전부다. 안보에서만큼은 확고한 보수였기에 그리고, 국민들은 안보관이 불투명한 문재인을 차마 선택할 수는 없었기에 박근혜를 선택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경제민주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된 것은 자유와 시장을 뼈대로 하는 ‘이념의 보수’가 국내 정치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친기업 깃발을 들었던 이명박 정부조차 동반성장의 슬로건을 함께 내걸었고 실용주의라는 타협적 간판으로 정체성을 숨겼다. 아니 이명박 정부 안에 자유시장주의자는 대통령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 단어는 지금도 새누리당 내에서 사실상 금기어다. 대학가와 지식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보수는 단 한 번도 내부의 이념투쟁을 거친 적이 없다. 선수(選數)를 빼곤 지력의 서열과 가치의 우열이 없다. 부패한 지역 호족들이 오직 선수만 내세워 지도부를 구성해왔다. 민주당은 투옥 경력이나마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김근태가 계급장 떼고 붙자고 했을 때는 그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노무현도 그 말을 빌려 썼다. 한국의 보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억지로 보수의 깃발을 떠맡겼고 과중한 책임을 지웠다. 그게 이제 한계에 온 것이다. 위기가 닥치자 보수는 바로 사분오열하고 있다. 이념이 없으니 기회주의가 준동할밖에.

대통령의 지력은 드러난 그대로다. 그러나 문재인 김무성을 비롯한 다른 대권 후보들의 지력도 다를 것이 없다. 그게 우리 수준이다. 언론이 박근혜를 내칠 때는 그 점도 기억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민원과 청탁을 해결해주고 예산을 따올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는다. 국가적 인물이나 정치적 지력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정치권이 점차 저질의 인물들로 들어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 대중은 종종 민중적 추동력에 매몰된다. 광장에서 무언가 군중 권력의 도취감을 맛보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광우병이든 최순실이든 월드컵이든 불과 열흘의 화끈한 캠페인이면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는 뒤집어진다. 후진적 특징이다. 새누리는 이제 해체하는 것이 좋겠다. 민주당은 문호를 활짝 열어 그들을 환영하라.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