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와 연인 사이> 속 얼반 라이트.
영화 <친구와 연인 사이> 속 얼반 라이트.
LA 카운티미술관은 LA 서쪽 도심 거의 한가운데에 있다. 미술관 북문 쪽에는 운반하는 데만 1000만달러가 든 ‘공중에 뜬 바위덩어리(Levitated Mass)’가 관람객들을 반긴다. 콘텐츠 면에서도 여타 미술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유럽과 아랍 미술에서 동아시아를 거쳐 미국 미술까지 시대와 지역을 망라하는 10여만점의 회화와 조각품이 소장돼 있다. 8만㎡ 규모의 7층짜리 복합 건물이 거대한 문화 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LA 카운티미술관 전경.
LA 카운티미술관 전경.
바로 이곳에서 영화 <페이스 오브 러브>의 니키(아네트 베닝 분)는 어느 날 우연히 죽은 남편 가렛과 똑같이 생긴 남자 톰(에드 해리스 분)을 스치듯 만난다. 그녀가 산 표는 제목도 의미심장한 ‘과거로의 회귀’라는 미술전이다. 이후 여자는 벤치에서 날마다 그를 기다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여자와 남자를 바꾸면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과 거의 동일한 설정이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것도 똑같다. “<현기증>을 오마주 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리 포신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 역시 LA 근교 미술관에서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벤치에서 톰을 기다리는 니키.
벤치에서 톰을 기다리는 니키.
니키가 톰을 만났던 LA 카운티미술관의 나무 벤치에 걸어가서 앉아봤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내려 앉는다. 이 벤치는 아맨슨(Ahmanson) 빌딩과 브로드 콘템포러리 아트 뮤지엄(BCAM)을 이어주는 통로에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브로드 현대 미술관에서 에이즈로 요절한 세계적인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미술관은 1965년에 지어졌지만, 브로드 현대 미술관은 2008년 세계적인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새롭게 구축한 건물이다. 렌조 피아노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 컬러풀한 색상을 입혔다. 그는 브로드 현대 미술관에도 빨간 쇠기둥으로 산뜻함을 불어 넣었다. 특히 브로드 현대 미술관 밖에는 ‘레드 스파이더(red spider) 에스컬레이터’라고 하는 유명한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으니 메이플소프 사진전을 보러 올라가는 길이 잠시나마 천국의 구름을 밟고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벤치와 레드 스파이더 에스컬레이터.
벤치와 레드 스파이더 에스컬레이터.
실제로 알찬 회화들은 아맨슨 빌딩에 다 모여 있다. 이 빌딩은 총 4층으로, 1층은 태평양 지역 작품, 2층은 독일 표현주의와 현대 화가의 작품, 3층은 고대 그리스 로마 유럽 미술, 4층은 이슬람 및 동남아 미술품으로 이뤄져 있다. 2층에는 마티즈, 칸딘스키,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그리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산재해 있다.

마티즈의 그림 ‘한 다발(La Gerbe)’.
마티즈의 그림 ‘한 다발(La Gerbe)’.
영화 <페이스 오브 러브>를 위해 LA 카운티미술관는 이례적으로 4일 동안 낮 촬영을 허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영화 속에 나오는 관객들도 다 진짜 관람객이다. LA 카운티미술관의 수많은 미술품 중에서 영화가 주목한 작품은 렘브란트의 ‘나사로의 부활’. 렘브란트는 치밀한 광선의 사용으로 화면 왼편 어두운 공간에 밝은 빛이 스며드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흰 수의를 입고 반쯤 몸을 일으키는 나사로는 죽은 자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고, 렘브란트는 그를 부활시킨 예수를 캔버스에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즉 이 작품을 통해 영화는 니키가 톰의 이름으로 부활한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복선을 깐다.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앞에 앉아 있는 니키.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앞에 앉아 있는 니키.
이외에도 일본, 한국, 중국관은 다른 빌딩에서 따로 전시하고 있는데 한국관의 경우 이하응, 즉 흥선대원군의 난초도나 까치 호랑이 소나무를 그린 호작도부터 백남준 서도호 양혜규 등 현대 미술가의 작품까지를 망라한다.

미술관을 모두 돌아본 뒤에는 해가 지길 기다린다. LA의 명물이자 LA 카운티미술관의 마스코트가 된 크리스 버든의 가로등 모음 얼반 라이트(Urban Light)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이다. 렌조 피아노는 브로드 현대 미술관을 지으며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여기에서 생산하는 11만와트(W)의 전기로 202개의 빈티지 가로등을 밝히고 있다.

메이플소프 사진전 입구.
메이플소프 사진전 입구.
이 가로등은 영화 <친구와 연인사이>의 데이트 장소로도 나온 곳이다. 여자는 바쁘고 건조한 의사 생활로 인해, 남자는 아버지가 전 여자친구를 빼앗아서 사랑할 틈도, 여유도 없어 사랑을 믿지 않는다. 엠마(나탈리 포트만 분)와 아담(애시튼 커처 분)은 몸은 먼저 섞었지만 마음은 섞지 않기로 한다. 점점 서로에게 끌리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따뜻한 데이트를 즐기던 장소가 바로 이곳 얼반 라이트 앞이다. 엠마가 꽃이 오글거린다고 하니까 당근을 선물로 준 아담은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당황한 엠마는 그를 밀어낸다.

영화에서 얼반 라이트의 둥근 불빛은 성적 긴장감에 휩싸인 젊은 커플의 마음을 낭만적으로 대변한다. 202개 가로등에 불이 켜지니, 마치 수많은 달이 하늘에 뜬 것 같다. 같은 가로등이지만 서로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가 섞여서 함께 살아가는 LA를 은유하기에 얼반 라이트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영화에서처럼 수많은 남녀가 가로등 밑에서 껴안고 사진을 찍는다. 같은 시대에 같은 기억을 갖게 하는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한 미술관. 대리석의 질감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기보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갖게 하는 곳. LA 카운티미술관의 문턱은 세계로 열려 있는 듯 보였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