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모호하고 지루한 것, 이것이 미래의 예술일까
“심장을 겨눠.” 영화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악당을 이렇게 도발한다. 희뿌연 먼지가 흩날리는 황량한 사막에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찌푸린 표정을 하고 어딘가 날이 곤두선 모습으로 그는 우뚝 서 있다. 황야의 무법자. 젊은 날의 이스트우드는 이렇게 불렸다. 일흔이 넘어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더욱 빛을 발한다. 감독으로서 이스트우드는 스토리의 감정적인 심장부를 겨눈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최근에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볼 수 있듯, 절제돼 있으면서 전달력이 크다.

심장을 겨누라는 이스트우드의 대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도는 이유는 최근 몇몇 현대미술 전시들을 보고 난 뒤 느낀 황량함 때문이다. 전시가 우리의 심장을 겨눴으면 좋겠는데 작품들은 심장을 꿰뚫기는커녕 심장 근처에까지 와 닿지도 않는다. 공감할 수 없다면, 마음에 울림을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예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어디를 겨누고 있는 것일까.

곧 막을 내리게 될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주제도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이다. 여기에 ‘제8기후대’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낱말이 붙어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좀 어려운 제목이 탄생했다. 제8기후대란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들이 찾아냈다는 지구상 일곱 개의 물리적 기후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상상의 세계라고 한다. 현실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으로 이뤄진 현실이며, 언뜻 미래세계와 관련된 단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예술이 이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탐색이라고 하겠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2016 미디어시티서울의 전시 제목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역시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수 없는 낱말들로 이뤄져 있다. 이 제목은 다니카와 ?타로가 쓴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미지의 별에서 쓰는 상상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인들은 늘 같은 구(球)에서 자고 일어나 일하며 저 멀리 화성에 대해 궁금해한다. 화성인들은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곳에서 네리리하거나 키르르하면서 혹은 하라라하며, 우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그렇듯 지구인과 화성인 사이에 소통하고픈 마음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러므로 조만간 어떤 계기로 이십억 광년 동안 이어왔던 정적이 깨어질 것이라는 상상이 이 시의 내용이다.

두 전시는 미래를 향한 예술적 탐색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소통의 확대라는 근사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획의도가 상상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두 전시장의 작품들은 속 시원하게 핵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즉각적인 반응에 워낙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은 서성이고 두리번거리다가 슬며시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린다.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관객의 심장을 겨누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작품이 중심 비워내기를 한 지 제법 오래됐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비엔날레와 같이 국제적으로 열리는 전시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소외된 부류들이 예술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적인 통로 역할을 해왔다. 선명하게 귀에 들어오는 한 집단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개인이 와글와글 제각각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핵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때는 신선함으로 관객의 심장을 겨눴던 현대미술은 어느덧 지루함으로 변해 있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아이디어들은 이젠 썩 궁금하지 않은 흔함으로 바뀌어 있다. 그토록 매력적이던 예술가의 도전들도 한때는 충격 그 자체였으나 요즘엔 다른 자극들 속에 파묻혀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현대미술 작품은 물음표로 남고 말았다. 우리는 예술에 인간의 심장을 겨눠달라고 외치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거울처럼 물음을 되돌려준다. “인간의 심장을 겨눠.” 예술이 인생을 가장 많이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예술도 인생도 정답 없이 물음표 일색이기 때문이다.

이주은 < 건국대학교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