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귀테슬로에 있는 글로벌 가전업체 밀레 본사에 지난 17일 서신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LG전자 본사. 밀레가 판매하는 드럼세탁기가 LG전자의 특허 수십 건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LG전자는 “특허기술 사용을 즉각 중단하고 원만한 해결 방안을 강구해달라”고 요구했다. 답변 기한으로 정한 이달 말까지 엿새밖에 남지 않았지만 밀레는 지금도 대응을 고민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로이터 등 외신들의 24일(현지시간)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스팀 세탁 기술 침해 더는 못참아!"…LG전자, '세탁기 100년' 밀레와 한판 붙는다
1899년 창업한 밀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전업체 중 하나다. 냉장고, 진공청소기도 생산하지만 창업 초기부터 생산해온 세탁기는 이 회사의 자존심이다. 귀테슬로의 밀레박물관에는 100년 전 제작한, 손으로 돌리는 나무 세탁기가 전시돼 있다. 매년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선 지금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담당 임원들이 밀레 전시관을 가장 오래 둘러본다. 2013년 IFA에서는 밀레 매장에서 모 전자업체 사장이 “우리는 왜 이렇게 만들지 못하느냐”고 임원들을 닦달하기도 했다.

◆10여년 전 LG가 개발한 기술

그런 밀레 세탁기의 핵심 기능에 대해 LG전자가 특허 문제를 제기했다. 고온의 증기를 전용관에서 세탁기 내부로 뿌려 온도와 습도를 끌어올리는 드럼세탁기의 스팀 기술에 대해서다. 이렇게 하면 세제가 세탁물에 잘 스며들어 세탁 효과가 높아지고 세탁 과정에서 전기도 적게 먹는다. LG전자가 독자 개발해 2005년 상품화한 것으로 국내에서 유통되는 LG전자 드럼세탁기에는 대부분 이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이면에는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기존 강자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LG전자의 판단이 깔려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조성진 사장 이하 H&A사업본부(가전 담당) 임원들의 오랜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유럽은 세계 가전 시장의 25%를 차지하지만 밀레 등 토종 업체들이 지배하고 있어 한국 업체들은 좀처럼 점유율을 높이지 못하고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쓰던 브랜드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 유럽 소비자를 변화시키려면 여러 수단이 필요하다”며 “유럽 소비자에게 LG전자 드럼세탁기의 스팀 기술을 알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세계 곳곳서 ‘가전 강자’와 충돌

2010년대 들어 한국 업체들은 시장 확대 과정에서 세계 곳곳의 가전 강자들과 충돌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호주에서 영국 가전업체 다이슨의 진공청소기를 상대로 허위광고 금지소송을 제기해 승리했다. 다이슨이 호주 진공청소기 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전략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반격도 만만치 않다. 미국 가전업체 월풀은 자국 드럼세탁기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덤핑 혐의로 고발해 최고 111%의 반덤핑 예비관세를 이끌어냈다. 다이슨도 한국 업체들을 특허 침해로 수차례 고발했다.

밀레 한국법인 관계자는 “해당 기술은 2013년부터 우리 제품에 적용해온 것”이라며 갑작스러운 LG전자의 요구에 당혹해하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이전부터 밀레가 우리 특허기술을 도용하는 것을 알았지만 해당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 많지 않아 일단 두고 보고 있었다”며 “올해 들어 갑자기 관련 제품 출시를 늘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해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