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고독이 노년의 외로움 찾아가죠"
지난해 연극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왕후의 씨앗을 살리기 위해 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촌부(村夫)의 심정을 절절하게 그려낸 배우 하성광(46·사진)이 ‘사회 부적응자’ ‘투덜이 조카’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오는 11월22일부터 12월11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에서다. 예술의전당이 자체 제작한 ‘고모를~’는 캐나다 작가 모리스 패니치의 대표작으로, 국내 초연이다. 해외에선 19년간 26개국에서 공연됐다. 임종을 앞둔 고모를 찾아가는 조카 켐프 역을 맡은 그를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이전에 했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입니다. 분노조절장애, 애정결핍, 경계성장애…. 이렇게 다채로운 성격장애가 있는 인물은 드물거든요, 하하. 저에게는 도전이겠지만, 하고 싶더라고요.”

켐프는 30년간 연락이 닿지 않던 고모에게 곧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편지를 받는다. 다니던 은행도 그만두고 달려가 보니 고모는 사계절이 지나도록 정정하기만 하다. 함께 크리스마스, 새해까지 보내고 난 뒤 켐프는 고모에게 숨겨진 ‘반전’과 마주한다.

켐프는 ‘사회 부적응자’에 속한다. 부모도, 애인도, 친구도 없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죽음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웃음이 날 정도다. 고모 앞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장례식 리허설’을 한다. 고모가 죽은 뒤 금니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며 “고모가 요즘 너무 건강해져서 걱정”이라고 말한다.

1년간 대답 없이 뜨개질만 하는 고모를 향해 뱉는 말에는 조울증에 걸린 아버지, 그를 여자로 만들려고 한 어머니 등 불행했던 켐프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하성광은 “얄미운 듯하면서도 안쓰럽고, 밀어내고 싶으면서도 안아주고 싶은 인물”이라며 “상처를 받으며 자란 한 인간이 사회와 부딪치며 적응해가는 노력이 애처로운 동시에 안쓰럽다”고 설명했다.

노년의 끝에 선 고모의 삶도 외롭긴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하성광은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에 마지막 남은 끈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비록 평생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친척일지라도 말이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비정상적’이라고 분류될 만한 분이 참 많아졌어요. 켐프도 그런 분과 똑같거든요. 연극이 끝나고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지하철에서 본 그 남자는 왜 그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왜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익숙한 사회가 됐을까. 어디서부터 곪았을까….”

켐프와 고모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21년 동안 연극이란 한 우물만 파온 하성광도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인간입니다. 켐프가 말하는 상처의 고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공감하는 상처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치료까진 아니어도 위안은 될 겁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