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한진해운 사태로 위기 맞은 K뷰티
한진볼티모어호가 부산항을 떠난 건 지난 8월17일이었다. 출항 1주일 뒤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배에는 G사가 한국에서 수입한 50만달러어치 화장품이 실려 있었다. 미국 최대 화장품 판매회사인 세포라와 10월부터 한 달간 공동마케팅을 벌일 물량이었다. 하지만 이 배는 뉴욕항 도착 날짜를 한 달이나 넘긴 채 지금 파나마에 압류돼 있다.

G사는 K뷰티의 성공 가능성 하나를 보고 젊은 한국인 여성 2명이 뉴욕에서 맨손으로 창업한 회사다. 세포라는 매년 10월 가장 ‘핫(hot)’한 신제품만 골라 한 달 동안 미국 350개 대리점에서 프로모션 행사를 연다. 세포라가 올해 선정한 아이템 중에는 G사가 브랜딩한 제품이 3개나 들어 있다.

G사의 L대표는 “창업 3년 만에 연 매출 1000만달러를 달성할 기회를 잡았지만 예상치 못한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라고 말했다. G사는 미국 전역에 보낼 화장품을 확보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항공기로 화물을 받고 있다.

G사 관계자는 “세포라를 잡기 위해 지난 1년간 회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도 한국에서 제때 화물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G사뿐 아니라 D사, K사 등 한국 중소 화장품을 수입해 미국 백화점 등에 납품하는 현지 기업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대형 유통업체의 구매책임자로부터 ‘앞으로 한국 회사들과 거래하기가 힘들겠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L대표는 지난 5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소비재 수출대전’의 연사로 초빙됐다. 대미 수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K뷰티를 활용한 미국 시장 공략 방안’을 알려 달라고 먼저 요청한 자리였다. 하지만 G사는 한진해운 법정관리 신청으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에 제공하는 정책자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진볼티모어호에는 G사처럼 한국을 대신해 미국 시장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 받을 컨테이너 수천개가 실려 있다. L대표는 “미국 시장을 공략해 달라고 독려한 정부가 지원을 외면하면서 현지 기업들만 무고한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