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배롱나무
점심 먹으러 가다 배롱나무 꽃 옆에 잠시 멈춘다. 지난 여름 땡볕 아래 피기 시작한 꽃잎이 아직도 붉고 곱다. 한 번 피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나무,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서 배기롱나무로 불리다 배롱나무가 됐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듯이 대부분의 꽃은 10일 이상 피지 않는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붉은 꽃을 석 달 반 이상 피워올린다.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게 아니라 여러 꽃망울이 이어가며 새로 핀다. 아래에서 위까지 꽃이 다 피는 데 몇 달이 걸린다. 그래서 꽃말이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예부터 부귀와 장수의 나무라고 믿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중국이 원산지이지만 고려 때 《보한집》이나 《파한집》에 꽃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 전에 들어온 듯하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도 “비단처럼 아름답고 이슬꽃처럼 온 마당을 비춰주어 그 어느 것보다도 유려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매천 황현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천 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며 이 꽃을 특히 아꼈다.

나무껍질은 매끄럽고 얼룩무늬가 있다.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배고팠던 시절 꽃이 다 질 때쯤이면 벼가 익는다는 의미에서 쌀밥나무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원숭이가 미끄러지는 나무라 해서 ‘사루스베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동에 있는 천연기념물 168호로 800살이 넘었다. 고려 중기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경주 남산 기슭의 서출지에도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있다. 전남 담양 후산리 명옥헌, 강진 백련사, 전북 고창 선운사 역시 배롱나무 명소로 이름났다.

배롱나무 붉은 꽃의 또 다른 이름은 자미화(紫薇花)다. ‘자’는 붉다, ‘미’는 배롱나무를 뜻한다. 당나라 현종이 너무나 좋아해서 국가적으로 장려했고 장안의 성읍을 자미성으로 바꿔 불렀을 정도다.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장한가’로 노래했던 시인 백거이는 ‘자미화’라는 시에서 자신을 자미옹(紫薇翁)이라 부르며 ‘심양 관사에 키 큰 두 그루 자미수 있고/ 흥선사 뜰에도 무성한 한 그루 있지만/ 어찌 소주에 안치돼 있던 곳에서/ 화당의 난간 달 밝은 밤에 보았던 것만 하리요’라고 읊었다.

‘자미화가 자미옹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름은 같으나 모습은 같지 않네’라던 그의 시구와 더불어 오늘밤 밝은 달빛 아래 배롱나무 꽃향기와 시향에 흠뻑 젖어보고 싶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