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에서 기획재정부의 ‘끗발’은 대단하다. 예산 시즌엔 다른 부처 국장, 지방자치단체장이 예산실 과장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선다. 기재부가 호치키스를 찍지 않으면 다른 부처의 정책은 빛을 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기재부엔 최고 인재가 모인다.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기재부에 가야 한다는 게 공식처럼 여겨졌다. 높은 업무 강도에도 행정고시 재경직 수석을 포함해 최상위권 합격자들은 대부분 기재부행을 택했다. 힘들게 일한 만큼 보상도 뒤따랐다.

이런 관가 분위기가 최근 달라졌다. 부처 선택 시 기재부 등 ‘끗발이 있지만 업무 강도가 센 부처’보다 ‘자기계발이 상대적으로 쉬운 곳’을 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장·차관이 아니라 국제기구나 대학으로의 이직을 꿈꾸는 젊은 공무원이 늘어난 까닭이다. 관료의 전반적인 위상 하락과 자기계발을 중시하는 세태, 민간의 역할 강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산다는 건] "입신양명도 싫다…끗발있어도 일 많은 부처 NO"
기재부 외면하는 재경직 수석들

과거와 달리 재경직 수석이 기재부를 외면했다는 소식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2012년과 2015년엔 재경직 수석이 금융위원회로 갔다. 올해엔 필기시험과 면접, 교육훈련 점수를 모두 합친 ‘교육성적’ 기준으로 재경직 수석이 행정자치부를 택했다. 재경직 2등과 3등, 5등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배치됐다. 성적 상위 10명 중 기재부 사무관 명함을 갖게 된 합격자는 2명에 불과했다.

자부심이 강한 기재부 관료들은 “2차 필기성적 기준으로 1등에서 5등까지는 모두 기재부에 왔다”며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관가 분위기는 다르다. 서울 근무 매력이 있는 금융위, 로펌 등으로 이직이 상대적으로 쉬운 공정위, 국세청 등이 젊은 사무관들에게 더 ‘실속 있는 부처’로 인기를 끌고 있다.

관료 위상 약화에 꿈 달라져

이 같은 트렌드는 젊은 공무원들의 직업의식이 바뀐 데 따른 측면이 크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9월 정부세종청사에서 일하는 사무관 104명을 대상으로 ‘경제관료로서 갖고 있는 꿈’을 물은 결과 교수·연구원(25.2%), 국제기구 진출(12.6%) 등을 꼽은 응답자가 절반을 넘었다. 장·차관을 고른 사무관은 14.6%에 불과했다.

가장 큰 원인은 관료의 위상 약화다. 과거엔 경제·사회부처를 불문하고 중앙부처 1급까지만 올라도 산하기관장 자리 ‘두 텀’이 보장됐다. 요즘엔 끗발이 있는 기재부 1급으로 퇴직해도 갈 곳이 없어 ‘실업자’로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법부의 위상에 눌려 행정부의 힘이 약해진 것도 원인 중 하나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정책 조항 문구까지 국회의 검증과 지적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행정부의 재량권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움츠러들었다”고 말했다.

‘입신양명’보다는 ‘웰빙’

비단 수습 사무관뿐만이 아니다. 고참 사무관이나 3~4급 중앙부처 과장 사이에서도 ‘입신양명’ 대신 ‘웰빙’을 택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 2년간 ‘음지(비선호 부서)’에서 일했던 한 중앙부처의 A과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핵심 보직’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해외 파견 근무’를 택했다. 고위공무원단에 빨리 입성하기 위해 핵심 보직을 밟고 실적을 쌓는 것보다 개인의 견문을 넓힐 수 있고 가족과의 ‘저녁’을 즐길 수 있는 삶을 택한 것이다.

최근 대기업으로 옮긴 경제부처 B부이사관은 승진 대신 이직을 염두에 두고 아예 3년 전 ‘정책부서’가 아니라 ‘지원부서’를 자원했다. 산업과 연관된 업무를 하면 ‘직무 연관성이 있는 기업에 3년간 취직’을 금지한 공직자윤리규정 때문에 이직이 불발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한 경제부처의 주무 사무관은 “솔직히 말해 사명감이나 애국심이 업무의 동력은 아닌 것 같다”며 “욕 안 먹을 정도로 업무를 책임지고 여유를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