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적'과 '-스런'의 동침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개혁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 30여년간 이어온 군사정권을 종식했다는 뜻에서 ‘문민정부’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게 ‘역사 바로 세우기’다. 하지만 이내 깊은 고민에 빠졌다. 5·18광주사태를 재조명하면서 그 뿌리인 12·12사태에 맞닥뜨렸다.

일명 ‘12·12’는 1979년 12월12일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이었다.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면 주동자 사법처리란 후폭풍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쿠데타가 아니라고 하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셈이라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올 게 뻔했다. 어느 쪽이든 정치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돌파구는 ‘-적(的)’에서 나왔다. 정부는 그해 5·18광주항쟁일을 맞아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희한한 문구를 내놨다.

‘-적’이 붙으면 말이 두루뭉술해진다. “꼭 그렇다고는 하지 못하지만, 그런 면이 좀 있다”는 투다. 그래서 이 말은 수사적 완곡어법의 수단으로 자주 쓰인다. ‘쿠데타는 아니지만 쿠데타 비슷한 사건’이란 모호한 표현으로 12·12의 실체를 비켜간 것이다. 한자어 ‘-적’은 수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우리말을 풍성하게 했다. 하지만 남발하면 말이 어색해진다. ‘사전적 조치’ ‘다방면적으로 뛰어나다’란 표현이 그런 사례다. ‘사전 조치’ ‘다방면으로 뛰어나다’라고 하면 충분하다. 일본어투라 우리말을 갉아먹는다는 지적도 있다. 마침 엊그제 교육부는 교과서 속 일본식 한자어를 우리말로 다듬겠다고 밝혔다. ‘-적’도 그중 하나로 포함됐다.

《우리말본》 등을 통해 국어 문법의 초석을 놓은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찍이 ‘-적’ 대신 우리말 ‘-스런’을 제시했다. ‘-스럽다’의 의미를 생각하면 딱이다. 그는 ‘객관적’ ‘역사적’ 같은 말을 ‘객관스런’ ‘역사스런’ 식으로 바꿔 썼다. ‘자랑스런~’ 등에서 보듯이 이 말은 지금도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 규범은 이 말을 틀린 것으로 볼 뿐이다. 문법적 일관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스런’을 양지로 나오게 할 필요가 있다. ‘-적’과 ‘-스런’을 같은 반열에 올려 골라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말 규범 체계를 다진 외솔이 오늘날 오히려 규범의 굴레에 씌어 있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오는 19일은 외솔 탄생 122주년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