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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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기업의 구매담당 A차장은 납품 업체 임직원 사이에 ‘저승사자’로 불린다. A차장이 한 부품업체의 문을 닫게 하면서 붙은 별명이다. A차장이 한 부품업체 사장에게 “집안에 급한 일이 있는데 돈을 빌려 줄 수 있겠나”라고 물었는데, 협력업체 사장이 “여력이 없다”고 거절한 게 화근이었다. A차장은 “나를 소홀히 대한다”며 이런저런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 업체와 거래 관계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일명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되면서 공공부문에서 발생하는 ‘갑질’은 다소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벗어난 민간 영역에서의 갑질은 계속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납품업체 사장 휴대폰까지 뒤져

[불편한 진실…2016 대한민국 갑질 리포트] 저승사자와의 '을사(乙死)조약', 돈 좀 빌리자…납품가 깎아라…확, 거래 끊는다
부품업체 사장 B씨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쓰지 않는다. 사소한 내용이라도 무조건 전화로 한다. 원청업체 직원들이 수시로 휴대전화를 검사하기 때문이다.

검 사 대상은 사장의 휴대전화만이 아니다. 원청기업의 담당자들은 협력업체의 재무상태나 생산실적 등 수많은 자료를 요구한다.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탄식이 나온다. 민간기업 직원이 다른 민간기업의 영업 기밀까지 샅샅이 들여다보고 임직원 사생활까지 침해하고 있지만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 원청업체가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하면 납품업체는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한다.

일방적 단가 인하도 거래관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갑질이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원청업체의 단가 인하 요구는 매년 초에 이뤄졌지만, 최근 경기 하락에 대한 부담감이 늘면서 수시로 인하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단가를 놓고 협상하는 과정도 생략된다. 원청업체의 구매 담당자가 “이달에는 10억원 깎읍시다”라고 통보하면 끝이다. 일부 기업은 아예 인건비와 재료비 등을 마음대로 산출한 뒤 납품계약서까지 만들어 납품기업에 보낸다.

거래기업 임직원 개인적인 갑질이 더 문제

납품기업 관계자들은 거래기업 임직원의 개인적인 갑질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기업 대 기업 간에 발생하는 불공정거래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임직원 개인의 갑질은 여전하다는 얘기다. “집안에 일이 생겼는데 몇 천만원 빌려 줄 수 있을까?”라는 압력은 납품기업 관계자들에게 익숙하다. 이자를 받기는커녕 언제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부서 직원들과 회식을 할 예정인데 ‘찬조출연’하라는 제안도 일상화된 갑질 중 하나다. 다른 납품기업 임원은 △유흥형 갑질 △생계형 갑질 △생존형 갑질 등으로 민간 갑질을 구분했다. 유흥형 갑질은 함께 유흥업소에 가자고 제안하거나 콘도 및 호텔 이용권을 요구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과장 및 대리급이 이런 갑질을 자주 한다는 설명이다. 생계형 갑질은 돈이나 값비싼 선물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고참 차장이나 부장들이 단골 주인공이다. 생존형 갑질은 퇴직이 임박한 임원이 자신을 납품기업 임원으로 뽑아달라고 요구하는 식으로 일어난다. 이 납품기업 임원은 “우리들끼리 모이면 ‘민간 영역에서 갑질이 더욱 심하고 노골적인데, 이를 막기 위해 김영란법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농담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갑질의 먹이사슬

거래관계에서 발생하는 갑질이 다른 갑질과 다른 점은 갑(甲)에서 을(乙)로, 을에서 병(丙) 그리고 정(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건설사 임원이 부하 직원에게 “비공식 운영자금이 필요한데 1억원을 구해봐라”라고 지시한 게 여러 협력업체에 전가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하 직원은 협력업체 사장에게 1억원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고, 이 협력업체는 2차 협력업체에 이를 떠넘겼다. 2차 협력업체는 3차 협력업체로 넘겼다. 결국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는 3차 협력업체가 1억원을 마련해야 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거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갑질은 기업 경영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고 건전한 경영 생태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도병욱/강현우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