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구청에 근무하는 A주무관은 2014년 말 구청이 보유한 제설용 살포기를 수리하기 위해 한 업체와 630만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기계 수리에 능숙한 A씨는 자신이 장비 일부를 직접 수리했다. 대신 업체에서 그에 상응하는 비용 300만원을 자신의 은행 계좌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A주무관의 ‘갑질’은 이듬해 초에도 계속됐다. 같은 수법으로 해당 업체와 도로 유지관리 장비 계약(460만원)을 체결해 340만원을 챙겼다. 자신이 빼돌린 돈은 유흥비 등으로 썼다. 업체에 대한 A씨의 상습적인 갑질은 지난해 말 감사원 특별조사에서 적발됐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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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주무관이 트집 잡으면 ‘상황 끝’

광고업체를 운영하는 B씨는 올초 광고판 설치를 위해 도로 점용 허가를 받으러 구청을 찾았다가 퇴짜를 맞았다. 현행 도로법과 관련 조례상 도로 점용 허가를 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구청 도로관리과 9급 주무관은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차일피일 허가를 미뤘다. 그로부터 6개월 뒤 B씨는 해당 주무관에게서 불허 통보를 받았다. ‘거리 미관에 좋지 않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것이다. B씨는 “실무 공무원이 트집을 잡으면 어떤 인허가도 이뤄질 수 없다”며 “기업인에겐 구청의 9급 주무관이 슈퍼 갑”이라고 털어놨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개혁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일선 현장에서는 공무원의 금품 수수 및 소극적인 업무 처리 등 ‘갑질 행각’이 여전하다는 지적이 많다. 기업인들은 중앙정부에 비해 지방자치단체의 갑질 행각이 더욱 심하다고 입을 모은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공장 설립 및 도로 점용 등 대부분 인허가권을 관할 시·군·구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은 지자체 공무원의 금품 수수 및 향응 비리는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보고 있다. 대신 ‘행태규제’로 대표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무원의 갑질은 더욱 심해졌다고 지적한다. 법적 요건을 갖췄음에도 유권해석을 내세워 인허가를 반려하거나 불허가 처분을 내려 민원인을 골탕먹인다.

기초 지자체에 주어진 유권해석 권한은 공무원이 공공연하게 갑질할 수 있는 원천이다. 관련 법령과 중앙정부의 지침이나 대법원 판례조차 지자체 공무원의 유권해석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민원인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과거처럼 차라리 뇌물을 줘서라도 인허가를 받는 게 훨씬 편했다’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돌 정도다.

보복 두려워 말 못하는 민원인

기업인 C씨가 태양광발전소를 설립하기 위해 관할 군청에 신청서를 낸 것은 2011년이었다. 법적 요건을 모두 갖춰 금방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신청서를 내자마자 공무원의 갑질이 시작됐다. 담당 주무관은 각종 이유를 대며 수십 차례 서류 보완을 요구했다. 공장 진입로 50m마다 차량이 빠져나갈 수 있는 도로를 만들라고까지 했다. 법에도 없는 조건이었다. C씨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주무관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법령상 근거 없는 주민동의서까지 받아오라고 했다. 참다못한 C씨가 이를 거부하자 군청은 신청서를 낸 지 4년 만인 지난해 5월 공장 설립을 불허한다고 통보했다.

기업인 D씨는 인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구청을 찾을 때마다 항상 담당 주무관을 먼저 찾아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 몇 년 전 겪은 아찔한 경험 탓이다. 평소 친분이 있는 담당 팀장에게 인허가 관련 설명을 한 D씨는 구청을 떠나자마자 9급 주무관의 전화를 받았다. ‘상관인 팀장에게 먼저 인사했다’며 다짜고짜 화를 냈다. 그러면서 도로 점용 허가를 미루겠다고 했다. D씨는 “담당 주무관을 즉시 찾아가 고개를 숙이며 수십 차례 사과한 뒤에야 간신히 허가받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공무원들도 할 말은 있다. 인허가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구청 주무관은 “인허가 분야 지방 공무원 사이에는 ‘한 번 뚫리면 전부 뚫린다’는 말이 있다”며 “규제를 풀어주면 꼭 특혜 시비가 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사소한 것이라도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을 할 이유가 없다”며 “새로운 것을 허가해줬다가 문제가 되면 모든 책임이 공무원에게 돌아온다”고 털어놨다.

기업인 E씨는 법령에도 없는 서류를 요구하고, 인허가를 차일피일 미룬 한 공무원의 ‘갑질 행위’를 해당 구청 감사관실에 제보했다가 낭패를 봤다. 감사관실이 ‘공무원의 정당한 유권해석’이라고 판단 내린 것이다.

일부에선 김영란법 악용 지적도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을 바라보는 민원인의 심정은 착잡하다. 청탁 자체를 금지한 김영란법으로 공무원의 갑질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기업인 F씨는 “예전엔 실무 주무관이 인허가를 차일피일 미루면 상관인 팀장과 과장에게 사정을 얘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김영란법 시행으로 주무관의 갑질만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공공연히 민원인과의 만남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한 구청 관계자는 “민원인에게 ‘알아서 처리할 테니 찾아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며 “인허가를 결정하는 실무 주무관의 재량권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