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공주 공산성엔 인조의 이야기가 있다
1624년 1월24일, 이괄이 평안도 영변에서 난을 일으켰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반란군의 숫자는 1만명을 넘었고,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병도 포함돼 있었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1등 공신에 들어가지 못했고, 여진족의 침입을 막으라고 영변이라는 벽지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괄의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내려오자, 인조는 궁궐을 버리고 피란길에 나섰다. 종묘와 사직의 신주까지 챙겨서 떠나는 길이었다. 인조가 한강에서 배 위에 올랐을 때 서울의 궁궐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인조는 서울을 떠난 지 5일 만에 과천, 수원, 직산, 천안을 거쳐 공주에 도착했다.

한편 이괄의 반란군은 선조의 아들이었던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서울로 입성했다. 그러나 이괄은 서울 인근 안현 전투에 관군에 대패했고, 남은 무리를 이끌고 이천까지 왔다가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괄의 난은 자중지란으로 끝이 났다.

인조는 공주에 있으면서 이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공주를 떠나지 않았다. 이괄의 잔당이 많이 남아 있어 불시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조는 공산성에 올라가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산성의 남쪽이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금강과 맞닿은 북쪽은 지대가 낮아 적의 화살이나 돌이 날아올 수 있겠다고 우려했다.

인조는 이괄의 목을 국왕에게 바치는 헌괵례를 거행한 뒤에야 공주를 떠났다. 5일 동안 공주에 머물면서 인조는 문무과 시험을 통해 공주의 인재를 뽑았고, 충청 관찰사와 병사, 공주목사의 품계를 올려줬다. 무사히 반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현재 공산성의 쌍수정(雙樹亭) 옆에는 인조가 공주에 머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와 비각이 있다. 인조를 수행한 우의정 신흠이 글을 지었고,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쌍수’란 이름은 인조가 서 있던 자리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왜 많은 피란지를 두고 공산성으로 갔을까? 당시 공주에는 충청 관찰사가 기거하던 감영이 있었다. 조선 초에 충청감영은 충주에 설치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충주는 쑥대밭이 됐고, 충청감영은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졌다. 공주의 충청감영은 처음에는 공산성 안에 세워졌다. 얼마 뒤에는 산성 안이 비좁아 산성 밖으로 나왔고, 이후로도 산성을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인조가 왔을 때 충청감영은 공산성 밖에 있었다. 인조는 공산성의 전략적 가치도 고려했다. 공산성은 웅진 시기 백제의 왕궁이 있던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세워진 요새지였다. 인조는 반란군이 쳐들어오면 공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면서, 반란군이 진압되기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지난주에 필자는 사학과 학생들과 함께 공주 송산리 고분과 공산성을 방문했다. 이곳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된 지역이다. 마침 공주에서는 백제문화제가 개최돼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이었고, 각종 볼거리와 먹거리를 찾아 나선 관광객들로 붐볐다. 거리의 풍경은 예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뒤 공주는 도시 환경이 좋아지고 관광 특수도 누리고 있었다. 다만 필자는 백제시대의 공주만 보이고 조선시대의 공주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공산성의 쌍수정에 도착했을 때 ‘충청감영 제자리 찾기’란 안내판이 있었다. 조선후기 공주에 있었던 충청감영을 복원하자는 시민운동으로 보였다. 그동안 백제 유적으로만 알려진 공산성에 조선시대의 역사가 더해지는 것 같아 반가웠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