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60년대부터 이어진 '임자, 해봤어?' 정신…"회사이름은 현대인데, 왜 군대 같죠? ㅠㅠ"
“임자, 해봤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명언이다. 그는 이런 불굴의 정신으로 현대그룹을 일궜다. 현대의 적통을 잇는 현대자동차그룹도 불도저 같은 도전 정신을 앞세워 글로벌 자동차업계 5위에 올랐다. 세계 각국을 굴러다니는 수많은 차를 보면 ‘현대차맨’들은 뿌듯하다. 하지만 힘든 점도 있다. 불굴의 정신이 강조되다 보니 아무래도 군대 같은 기업 문화가 강해서다. 현대차그룹 김과장 이대리들의 직장생활을 들여다봤다.

현대·기아차 한 지붕 두 가족

현대·기아자동차는 한 지붕 두 가족으로 불린다. 같은 그룹이지만 큰집 현대차와 작은집 기아차는 제품 판매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다. 현대차를 몰고 기아차 공장에 들어가거나 그 반대 경우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다. 지난해 두 회사의 간판 모델인 2016년형 쏘나타와 2세대 K5가 출시됐을 땐 다른 업체 차보다 서로를 더 의식했다. 한발 앞서려고 판매 시기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생산과 판매에서 경쟁하는 사이지만 연구개발 부문은 통합돼 있다. 이 때문에 두 회사 직원들은 제품 개발 단계에서도 경쟁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기아차의 생산 차종 대부분이 주요 부품을 공유하고 있어 서로 동급의 신차 출시 계획부터 신경전을 벌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기아차 직원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삼성이 삼성 ‘전자’와 ‘후자’로 나뉘듯 현대차그룹도 ‘차(車)’와 ‘비차(非車)’로 나뉜다. 큰집이니 작은집이니 투덜거려도 현대차와 기아차 직원들의 작년 평균 연봉은 9700만원에 달했다. 자동차 회사가 아닌 부품사 등은 이보다 적다. 비교적 잘나가는 현대모비스가 9000만원(작년 기준)이며 현대제철은 8700만원, 현대글로비스는 6516만원으로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비차 계열사 직원들 사이에선 “비차 직원은 연봉도 비참”이란 말이 나온다. 올초 자동차부품 핵심 계열사인 현대다이모스에 입사한 김모 사원은 추석 연휴 때 친척들에게 회사를 설명하느라 애먹었다. 그룹 내에선 중요한 회사라고 하지만,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아서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 조카가 프로야구단(NC다이노스)에 입사했냐고 할 땐 기가 찼죠.”

아침 체조하고 결재판 들고 다니는 직원들

‘시키면 한다’는 군대식 문화는 현대차그룹을 지배한다. 출근 시간부터 그렇다.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시작된 새벽 출근이 지금도 계속된다. 정몽구 그룹 회장이 오전 6시 이전에 출근하기 때문에 주요 경영진과 임원들도 오전 6시30분까지는 회사에 나온다. 현대차 박 부장은 “아침 근무가 빨리 시작돼 직원들이 오전 7시30분에 다른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업무를 물어봐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오전 8시면 계열사 사무실마다 설치된 TV에서 국민체조 같은 아침 체조가 방송된다. 경력사원인 정모 대리는 “처음엔 ‘아직 이런 회사가 있구나’ 싶었는데 전 직원이 자연스럽게 체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동화됐다”고 말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결재판을 들고 가서 보고하는 관행도 남아 있다. 상사가 외부 인사와 식사 약속이 있으면 부하 직원은 후보 장소를 몇 군데 골라 문서로 뽑은 다음 결재판에 넣어 보고하는 식이다. “직급보다는 ‘형’ ‘동생’ 하는 분위기가 결속력을 높이는 측면도 있지만 가끔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너무 편하게 대하는 경우도 있다”(현대제철 김모 과장)는 얘기도 나온다.

남성적 문화가 강하다 보니 계열 광고회사인 이노션 직원들은 불만이 많다. 자동차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여성의 감성을 강조한 광고를 제안해도 번번이 탈락해서다. 이노션의 이모 대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놔도 채택되는 건 과거 스타일밖에 없다”고 전했다.

‘강성 노조’…나쁜 이미지·루머 탓에 골치

‘강성 노조’ 탓에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경우도 많다. 친구들을 만나면 “너희 회사는 노조원 월급 올려주느라 실적도 부진하다며?”하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노조 덕을 볼 때도 있다. 우선 연봉이 많고, 노조원인 대리까지는 상급자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부장이 갑자기 ‘회식’을 외쳤을 때 대리 이하 직원들은 빠지고 과장급 이상만 모이는 경우도 흔하다. 승진을 기피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과장급부터는 일이 많아지고 책임도 커지지만, 노조 보호를 받는 대리급 이하 직원에겐 ‘칼퇴근’과 ‘고액 연봉’이 보장됩니다.”(현대자동차 한모 차장)

현대차와 기아차 직원들은 신차를 내놓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판매 실적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악성 댓글을 다는 ‘댓글부대’가 얼마나 달려들지 걱정돼서다. 현대차의 박모 차장은 “따끔한 충고와 소중한 조언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법적 대응을 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날 때도 많다”고 말했다.

좋은 차 싸게 사는 건 좋지만

현대차의 황모 과장은 올해 제네시스 G80을 샀다. 이전 그의 차는 그랜저HG였다. 친구들 대부분 쏘나타급을 몰지만 황 과장은 이미 임원급 세단을 몰고 다니는 셈이다. 황 과장은 “현대차 직원은 일정 기간마다 신차를 싸게 살 수 있다”며 “기회가 될 때마다 차를 바꾸다 보니 어느덧 제네시스까지 사게 됐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신차 구매 시 근속 연수에 따라 20~30% 할인 혜택을 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 명의로 사는 건 금지한다. 황 과장은 “자동차 명의가 일정 기간 본인 이름으로 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직원 할인을 받아달라’는 지인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며 “사주기 싫어 그런 게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아차의 이모 대리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차가 잘 안 나간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자잘한 불평부터 ‘국내에서만 폭리를 취하고 해외에선 싸게 파는 것 아니냐’는 시비까지 걸어온다.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 커

현대차 남양연구소의 최모 연구원은 스트레스에 잠을 잘 못 잔다. 자율주행차, 커넥티드카 등 미래차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업무량이 폭주해서다. 회사 내부는 물론 언론 등 밖에서도 현대차의 미래차 개발 상황에 주목하다 보니 부담이 크다. 김모 연구원은 “심적 부담이 커 집에서 쉴 때도 맘이 편하지 않다”고 토로했다. 전기차 개발 등을 위해 정보기술(IT) 기반 회사에서 옮겨 온 직원들이 많아지며 문화 충돌도 잦아졌다. 군대식 문화이다 보니 세대 간 갈등도 발생한다.

현대차그룹 직원들 사이에선 최근 ‘비(非) GBC세대’란 말이 나온다. 그룹 통합 신사옥인 서울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에서 일하기 어려운 임직원을 뜻한다. 105층 높이의 GBC는 내년 초 착공돼 2021년 말에나 완공된다. 완공 시기가 늦다 보니 말년 부장이나 임원들은 “GBC 구경도 못해 보고 회사 떠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을 늘어놓는다.

장창민/강현우/김순신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