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은 끝났다…이젠 '자존감 회복'이 대세
“부도 당시 빚이 69억원을 넘었고 아직도 갚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저의 가치는 1000억원입니다.”

1990년대 국내 가요계를 휩쓴 그룹 룰라의 리더 이상민(사진)이 지난 21일 첫 방송된 JTBC의 ‘말하는 대로’에서 당당하게 한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1000억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이 의아해 하자 그는 설명했다. “잘나갈 때보다 사업 실패 후 더 가치가 높아졌어요. 다시는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는 시민들에게 각자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한 시민은 소심한 표정으로 “1000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상민은 “그런 생각은 잘못됐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해야 세상도 알아준다”고 강조했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힐링'은 끝났다…이젠 '자존감 회복'이 대세
‘말하는 대로’는 거리 공연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얘기하는 버스킹 프로그램이다. 마이크를 잡은 유명인의 이야기엔 공통점이 있었다. ‘자존감(자아존중감)’이다. 미국 출신 방송인 타일러 라시는 “호구처럼 살지 말자”고 주장했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들이 건방지다고 생각할까봐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건방져도 괜찮다”고 말했다.

지친 마음을 ‘힐링’ 콘텐츠로 달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자존감의 시대다. 종교인이나 성공한 사람 등이 나와 마음의 평온을 강조하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줄었다. 대신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들여다보게 하고, 이를 통해 삶의 활력을 찾게 해주는 콘텐츠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저성장의 시대,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실패는 잦아졌다. 고민을 들어주는 이는 없다.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다잡고 자신만의 기쁨을 찾아야 한다. 방송, 책, 영화 등 문화 콘텐츠는 이를 위한 가장 가깝고도 친숙한 수단이다.

콘텐츠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중의 코드는 시대와 함께 변해왔다. 급격한 경제 발전의 시기엔 앞다퉈 성공을 쟁취하려는 ‘생존’ 코드가 드라마 등을 지배했다. 외환위기 이후엔 양극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생긴 불안을 잠재울 ‘힐링’으로 바뀌었다. 2011년 방영된 SBS의 ‘힐링캠프’는 그래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힐링 콘텐츠로 위로받은 마음은 이내 허무해졌다. 철저한 각자도생의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일시적 힐링으론 좌절감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결국 ‘자존감’이 가장 중요한 코드로 떠올랐다.

이에 맞춰 콘텐츠도 재편되고 있다. O tvN의 ‘어쩌다 어른’은 몸이 자랐어도 아직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을 위해 매주 특강을 연다. 스타강사 김미경은 22일과 29일 출연해 “실패를 좌절로 생각하지 말고 오차로 생각해야 한다. 내 몸 안에 실패의 스승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송과 동시에 검색어 순위 1~2위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방송뿐만 아니다. 자존감에 관한 책도 올 들어 잇따라 출간됐다.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쓴 언제나 당신이 옳다, 독일 심리학자 슈테파니 슈탈의 심리학, 자존감을 부탁해, 정신과 의사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 등이다.

자존감은 영어로 ‘셀프이스팀(self-esteem)’이다. 이 단어처럼 자존감은 오롯이 ‘셀프’로 달성해야 할 숙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 쓸쓸히 노년을 보내는 시니어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란 고민에 부딪힌다. 자존감 수업의 저자는 “형제의 수가 줄었으며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기 바쁘다. 그렇다고 동료가, 이웃이 내 고민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여도 꽉 막힌 고립의 시대”라고 설명한다.

‘마이웨이(My way)’를 부른 미국의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각도가 곧 태도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