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부메랑: 그리스가 우스워 보이던가
“그리스인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부를 어마어마한 돈 보따리로 만들어 한몫씩 나눠 받고 싶어 했다. 국영철도회사는 연간 임금이 4억유로에 기타 지출이 3억유로인 데 비해 연간 수익은 1억유로에 불과하다. 직원들의 연간 소득은 평균 6만5000유로(약 9500만원)다. 스테파노스 마노스 전 재무부 장관이 ‘그리스 철도 승객 전체를 택시에 태우는 것이 더 싸게 먹힐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마이클 루이스가 쓴 《부메랑》에 나오는 얘기다. 그리스가 세계 경제의 천덕꾸러기로 타락하게 된 과정을 다룬 장(章·chapter)의 제목이 <그들은 새로운 수학을 창조했다>다. 이런 대목도 있다. “그리스인이 ‘중노동’으로 분류한 직종의 정년은 남성이 55세, 여성이 50세다. 이때부터 국가에서는 연금을 넉넉하게 퍼주기 시작한다. 600개 이상의 직업이 ‘중노동’으로 분류돼 있다. 미용사, 라디오 아나운서, 웨이터, 음악인 등도 포함돼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곳곳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그리스에서는 철도 버스 선박 학교 등의 파업 일정을 안내하는 ‘종합 파업 안내 사이트(www.apergia.gr)’가 매일 아침 필수이용목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세금징수 기능이 망가진 지도 꽤 됐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한물 지나간 그리스 얘기를 새삼 꺼내드는 심사가 편치 않다. 한국이 아무리 망가지고 있기로서니, 그리스와 맞비교할 정도까지야 되겠는가. 그런데 ‘운동 방향’이 너무도 비슷하다. 그게 섬뜩하다.

‘성과연봉제 반대’를 내걸고 철도와 지하철 노조가 22년 만의 공동파업에 나선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귀족노조’의 대명사로 불리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돈을 더 내놓으라”며 파업을 벌였다. 매달 봉급을 5만8000원 올리고 성과급 350%를 주며, 격려금 330만원을 얹어주는 데 더해 전통시장 상품권 20만원, 회사 주식 10주씩을 지급하기로 한 잠정합의안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1인당 인건비는 지난해 약 9400만원으로 일본 도요타(약 8351만원), 독일 폭스바겐(약 9062만원)보다 훨씬 많다. 성과가 더 좋다면 시비를 걸 일이 아니다. 1인당 생산 대수와 매출은 도요타의 절반 수준이다.

일은 덜 하고 돈은 더 받는 ‘노조 천국’의 비용이 참담하다. 국내 일자리가 대거 증발하고 있다. 해외 11곳에서 공장을 돌리며 4만6000여명을 고용하고 있는 현대차가 국내에서 공장을 늘린 건 20년 전인 1996년 아산공장 증설이 마지막이다. 세금도 정치에 오염돼 뒤죽박죽이 돼 가고 있다. 선거 때마다 선심성 감면이 되풀이되면서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면제자가 전체 대상자의 절반 수준(48%)으로 불어났다.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건 모든 셈법을 ‘선거 승리’에만 맞추는 정치권 행태도 그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거대 야당은 “태도가 괘씸하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갓 임명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고, 여당은 그런 거야(巨野)의 기세를 꺾겠다며 피켓 시위와 단식 농성으로 노이즈 마케팅에 나섰다. 1년 남짓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어떻게든 정권을 거머쥐는 게 최우선 과제다. 북핵과 경제 위기 따위는 뒷전이다.

그리스 얘기로 돌아가 보자. 지난해 선거에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중도좌파 사회당과 중도우파 신민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양당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당의 ‘집권 지상주의(至上主義)’ 경쟁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거대 표밭을 틀어쥔 노조 요구를 앞다퉈 들어줘 괴물을 키웠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마구잡이로 늘려 (공공인력의 25%가 과잉인력으로 분류될 정도) 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한국 정치판은 그리스와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남용하므로 자멸한다. 시민들에게 뻔뻔함을 권리, 무법을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믿기엔 너무도 생생하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