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임시 수도 기념관.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꾼 부산 정치 파동은 전쟁 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어났다.
부산 임시 수도 기념관.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꾼 부산 정치 파동은 전쟁 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일어났다.
잿더미 위에 선 나라

일단 대포 소리는 멎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지요.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주린 배를 달래가며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에 나서야 했습니다. 언제 다시 침략해올지 모르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군사력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군사력을 키우는 것은 물론 복구를 수행할 자원도, 돈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미국의 경제 원조였지요. 미국은 한국 경제가 생산재 공업보다 소비재 공업을 먼저 건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야 물가를 하루빨리 낮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원조 달러를 기간 산업과 생산재 공업의 건설에 투자하기 원했습니다. 기간 산업은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국가 산업의 기초가 되는 산업이지요. 예를 들면 금속 산업, 에너지 산업, 수송 산업 등입니다. 우리 정부는 원조 달러만큼 수입한 물자를 민간에 판매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돈을 대충자금이라고 했지요. 미국이 현금으로 원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충 자금 중 30∼40%는 국방비로, 40~50%는 도로, 항만, 수도, 전기 등의 사회 간접 자본 건설에 투자되었습니다.
부산 북항의 전경. 피란민의 눈물로 얼룩져 있던 부산 항구는 전쟁 이후 우리 경제 발전의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부산 북항의 전경. 피란민의 눈물로 얼룩져 있던 부산 항구는 전쟁 이후 우리 경제 발전의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국민이 배워야 한다…초등교육 의무화

미국의 원조와 이를 적절히 활용한 정부의 정책 덕분에 우리 경제는 서서히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이후 우리 경제가 이룬 ‘한강의 기적’도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가 힘겹게 이뤄놓은 공업화가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가 우리 사회에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교육 혁명입니다. 1949년 교육법이 제정되어 모든 국민은 자녀가 만 5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지요. “모든 국민은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한 건국 헌법의 정신이 실현된 것입니다.

정부는 1955년부터 교육 투자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1959년까지 정부 예산 중 교육비는 국방비 다음으로 많이 책정되었습니다. 국민들도 놀라운 교육열로 이에 호응했지요. 덕분에 교육받은 국민이 많이 늘어났고 이들이 고급 인력으로서 1960년대 산업 현장을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육은 우리 국민이 민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도 키워줬습니다.

이 무렵 정치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던 이전 방식을 버리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바뀐 것입니다.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했던 야당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자기 편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 국가 원수가 바뀌면 큰 혼란이 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절대 다수의 국민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방식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한민당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정치 의식 수준이 낮아서 대통령을 제대로 뽑을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전쟁 중에 일어난 부산정치 파동

그때 국무총리였던 장택상이 정부와 야당이 내놓은 두 개의 개헌안 중 내용을 가려 뽑아(발췌) 새로운 개헌안(발췌 개헌안)을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이 발췌 개헌안은 대통령 직선제에 내각 책임제 요소를 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당 의원들은 이 안을 처리하러 국회에 나오기를 거부했지요. 당시 경찰과 군인들이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고 나와 표결을 위한 정족수를 채웠습니다.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공산군과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 무리는 있었지만 결국 발췌 개헌안은 통과되었고 우리 국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선거 결과 이승만 후보는 523만 표를, 경쟁 후보였던 이시영 후보는 76만 표를 얻었습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이승만은 우리 국민이 직접 뽑은 첫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글=황인희 / 사진=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