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꺼림칙한 금감원의 한진 여신 점검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에 약속한 600억원의 지원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 지난 18일. 대한항공의 한 임원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나치듯이 “지금 가장 두려운 건 정부가 여신을 줄이는 것”이란 말을 했다.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이틀도 안 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융감독원이 한진그룹 35개 계열사의 은행권 여신 현황을 파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개별 부실기업이 아니라 경영에 문제가 없는 계열사, 게다가 그룹 전체 여신을 점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감원의 이번 조치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진해운의 전 대주주인 한진그룹을 강하게 질타한 직후 나왔다.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한진해운 사태에 대해 한진그룹을 겨냥해 “대주주가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항공이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부랴부랴 긴급 이사회를 연 배경이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뚜렷한 담보 없이 한진해운을 지원하는 것은 명백한 배임”이라는 사외이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뚜렷한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금감원의 여신 점검이 ‘한진그룹 압박용’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금감원은 “은행 건전성 차원의 점검일 뿐 압박 의도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금융당국이 여신 규모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해운사 사장을 지낸 A씨는 “정부나 국책은행이 어떤 기업을 불신하는 듯한 움직임만 보여도 해당 기업은 자금 조달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당장 국내 금융권이 정부 눈치를 보며 여신을 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외 금융회사들도 여차하면 여신 축소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무너지면서 외국 금융사들의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다. 자칫하면 국내외 금융권에 한진그룹의 재무구조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 굳이 이런 시기에 한진그룹 여신 점검을 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보면 볼수록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여신 점검이다.

주용석 산업부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