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왼쪽)와 남장여성 내시(김유정 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왼쪽)와 남장여성 내시(김유정 분).
“박보검 대사가 조선 순조실록에 기록된 효명세자의 상소문에서 가져온 거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지난달 방영된 KBS 월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3회를 본 한 네티즌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극 중 효명세자(박보검 분)가 대리청정을 명한 순조(김승수 분)에게 명을 거둬 달라고 한 대사를 인상 깊게 본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공부 끝에 이 대사가 순조실록 28권에 실린 효명세자의 상소문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역알못(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드라마 때문에 ‘역사저널 그날’(KBS)과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고 있다” “드라마 덕분에 국사 교과서에 한 줄밖에 나오지 않는 효명세자의 업적을 재조명하게 된 것 같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퓨전 사극 시청자들 역사공부 ‘붐’

사극, 뭐가 사실이고 허구지?…역사공부에 빠진 2030
퓨전 사극 열풍 덕분에 역사 공부에 빠진 젊은 시청자가 늘고 있다. 드라마 ‘구르미~’의 평균 시청률이 20%를 기록하고, SBS 월화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가 주목받으면서 사료를 찾아보거나 작품의 배경이 된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이가 부쩍 늘었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 결과다. 퓨전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이 역설적으로 사실(史實)과 허구를 정확히 가리기 위한 역사 공부의 계기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드라마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청자가 늘어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역사적 고증도 중요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온라인과 SNS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해 활발한 탐색과 토론이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드라마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역사와 퓨전 사극의 ‘공진화(共進化)’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일 월화 드라마가 끝난 오후 11시. 인터넷 포털에선 홍경래(1위) 광종(4위) 효명세자(9위) 등 역사적 인물들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점령했다. 시청자들이 역사 공부에 열을 올리는 건 드라마의 복선이 궁금해서다. 역사와 오피셜을 더한 ‘역피셜’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역사적 사실을 통한 비공식 확인이라는 뜻으로,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는 의미다.

◆역사에서 ‘스포일러’ 찾아라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구르미~’의 경우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 가문에서 세자빈이 나오고, 대리청정을 통해 왕권 회복을 위해 힘쓰던 효명세자가 21세에 요절한다는 내용 등이 대표적인 역피셜이다.

역사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드라마에는 효명세자 외에도 홍경래 김삿갓 정약용 등이 등장한다. 김삿갓의 회상 장면을 그린 10회가 방영되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김삿갓과 홍경래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 네티즌은 사료를 근거로 “김병연(김삿갓)은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항복했던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의 손자”라며 “이런 사실을 몰랐던 김병연은 자신의 조부를 규탄하는 시로 장원급제한 사실이 부끄러워 평생 삿갓을 쓰고 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시청자들은 ‘슬픈 결말’이 예상된다며 안타까워했다.

‘달의 연인’ 제작진은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 초기 왕의 계보를 그래픽으로 제작했다. 포악하고 잔인한 왕으로 기록된 광종(이준기 분)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개혁적인 군주였다는 사실을 그래픽을 통해 알리기도 했다. 시청자가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 등을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면서 분석하는 재미도 있다. 사료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결말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구르미~’ 제작진은 효명세자의 이름을 이영(李)에서 이영(李)으로 바꿨다. 외조부 김조순(1765~1832)은 김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출판계에도 역사서 열풍

사극, 뭐가 사실이고 허구지?…역사공부에 빠진 2030
2030세대의 ‘역사공부 열풍’은 출판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스24가 1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7주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역사서는 40~50대 남성의 관심이 높은 장르인데도 이 책 구매자의 55%가 20~30대, 70%가 여성이다. MBC 예능 ‘무한도전’의 한국사 특강, 퓨전 사극의 잇단 흥행 덕분이다. 《2017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8위)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18위) 등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효명세자 투어’도 등장했다.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지은 창덕궁 후원 연경당을 비롯해 창경궁 일대, 김조순의 옥호정이 있던 옥호정 터 등을 찾는 이가 늘어난 것.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사극이 역사를 배우는 창구로 인식되던 예전과 달리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켜 주는 장르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