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변 모습
일제강점기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변 모습
남원(南原)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시대 5소경 가운데 하나인 남원경에서 비롯됐다. 소경은 수도인 경주가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라 31대 임금인 신문왕이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도청 격이다. 남원경은 호남지방의 유일한 소경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도(道) 단위 격인 도호부가 설치돼 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구한말인 1895년 지방 개편 때도 전라도를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로 나눌 정도로 규모가 컸다. 고려 초기 등장한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은 전주(全州)의 ‘전(全)’과 나주(羅州)의 ‘나(羅)’를 딴 것이다.

예로부터 남원은 호남의 대표 곡창지대로 각종 물산이 풍부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호남의 행정 거점이자 풍광이 좋았던 남원엔 큰 객관(客館)이 있어 많은 사람이 여행길에 묵고 갔다. 남원은 호남지방에서 정자와 누각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다.

소설 춘향전의 배경으로 유명한 광한루(廣寒樓)는 조선시대 대표 문신인 황희, 정인지, 정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물 제281호로 지정된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른다는 궁궐인 ‘광한전’에서 이름을 따왔다. 남원으로 귀양 온 황희 정승이 지금의 요천변에 광통루(廣通樓)를 세웠고, 집현전 학사로 잘 알려진 정인지가 광한루로 이름을 바꿨다.

지리산과 섬진강으로 둘러싸인 남원은 왜구의 북상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말인 1380년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황산대첩으로 유명한 황산(荒山)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원에선 의병장 조경남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의 북상을 막았다. 사적 제272호인 만인의총(萬人義塚)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군과 맞서다 전사한 군인과 백성 1만여명을 합장한 무덤이다.

남원=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