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메밀꽃' 사연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소설 중 하나다. 이효석은 이 작품을 1936년 10월 월간 <조광>을 통해 발표했다. 당시 제목은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 그가 장돌뱅이 허 생원을 통해 그린, 산허리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도 ‘모밀밭’이었다. 지금은 제목이든 본문이든 ‘메밀꽃’ ‘메밀밭’이다. 언제부터, 왜 그리 바뀌었을까. 여기엔 사연이 있다. 표준어라는 잣대가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한 탓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왔다. 80년을 끌어온, 우리말의 오랜 고민거리 중 하나인 셈이다.

논란의 핵심은 문학작품에까지 규범을 적용해도 되는가에 있다. 작품이 나온 그해 같은 달 조선어학회는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이는 지금껏 이어져오는 표준어 규정의 골격을 세운 획기적 업적이었다. 이때 표준어로 채택한 게 메밀이다. 1938년 조선일보에서 펴낸 <현대조선문학전집>에 수록된 이효석 작품은 이미 ‘메밀꽃 필 무렵’이다. 모밀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메밀이 어디서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시중에서 여전히 모밀국수니 모밀냉면이니 하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모밀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일부에서 모밀을 틀린 말로 알고 있는 것은 과거 그릇된 우리 어문정책 탓이 크다.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모밀을 ‘메밀의 잘못’으로 규정했다. 모밀은 메밀의 고어이자 원말이다. ‘뫼(山)+밀(小麥)’이 모밀을 거쳐 메밀로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다. ‘모밀’은 잘못 쓰거나 틀린 말이 아니라 사투리일 뿐이다. 배척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창작품에 쓰인 말을 표준어 잣대로 바꿀 수 있는지도 논란거리다. 이효석의 장녀 이나미 여사는 생전에 자전적 수필집에서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제목까지 바꾸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소설의 원제목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사전 편찬 권위자인 조재수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 상임이사는 “지역어나 작가의 어휘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며 “표준어가 아니라고 해서 배척한다면 이는 표준어를 제정한 의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품 무대인 강원 평창군 봉평에는 지금 메밀꽃이 지천이다. ‘모밀꽃 필 무렵’의 자취를 따라 메밀향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이 가을 정취를 더하는 일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