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래동의 우진정밀은 금속가공업체다. 이 지역에는 1300여개에 이르는 금속가공업체가 있다. 우진정밀은 의약품용 소프트젤 성형기라는 독특한 분야로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주4일 야근을 하는 이 회사의 비결은 무엇일까.
손길배 우진정밀 사장이 문래동 공장에서 소프트젤 성형기 부품 가공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낙훈  기자
손길배 우진정밀 사장이 문래동 공장에서 소프트젤 성형기 부품 가공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낙훈 기자
서울 영등포초등학교에서 신도림역으로 달리다 보면 왼쪽에 공장밀집지역이 나온다. 경인국도와 경인철도 사이에 놓인 직사각형 형태의 이 지역이 문래동 1가다. 1300여개 문래동 소기업 중 수백개가 밀집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우진정밀(사장 손길배·57)에 들어서면 선반 밀링 등으로 쇠를 깎는 소리가 들린다. 원통형 스테인리스 봉을 깎고 다듬어 날렵한 모양의 기계 부품을 제작한다. 이 회사는 1주일에 평균 4일 정도 잔업을 한다. 손길배 사장은 “요즘도 주문이 밀려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의약품용 소프트젤 성형기 부품이다. 젤라틴을 성형하는 장치다. 젤라틴은 쓴 약을 먹기 좋게 하는 포장용기다. 먹으면 몸속에서 분해된다.

우진정밀이 제조하는 금속제품은 제약기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이다. 소프트젤 포장기 성형기 부품은 제약기계 완제품업체인 창성소프트젤에 납품되고 이 회사는 50여개국에 이를 수출한다. 우진정밀이 가공하는 주요 부품이 제약기계로 완성돼 미주 동남아 유럽으로 나가는 셈이다.

[BIZ Success Story] 손길배 우진정밀 사장 "40년 금속가공 외길…제약기계 핵심부품으로 50개국 시장 개척"
손 사장은 “세계적인 제약업체가 생산하는 젤라틴 포장약품 중 우리 부품으로 생산되는 약품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말했다. 우진정밀이 국내 소프트젤 성형기 핵심 부품 분야에서 이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손 사장의 약 40년에 걸친 금속가공 노하우다. 충남 보령 출신인 손 사장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상경해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본격적인 직장생활은 1970년대 후반 오리엔트시계에서 시작했다.

그는 “당시 성수동에 있던 오리엔트시계에는 수천명의 근로자가 일했는데 이곳에서 쇠깎는 기계를 접했다”고 설명했다. 금속을 미세하게 조각하는 부서에서 일했는데 “좀 더 큰 기계를 다루고 싶다”며 부서장에게 건의해 밀링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1주일에 장갑 한 켤레가 지급됐는데 열심히 일을 배우다 보니 금방 닳아 남들이 버린 장갑을 빨아 쓰곤 했다”고 회고했다.

일을 배우는 게 재미있었다. 쇠를 깎아서 원하는 물건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이후 직장 선배가 창업한 문래동에 놀러갔다가 1982년 이곳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정착했다. 손 사장은 “1980년대엔 경기가 좋아 작은 공장에서도 1년이면 집 한두 채를 마련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3년 33㎡짜리 공장을 임차해 밀링 한 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퇴직금 500만원으로 기계를 할부로 구입한 뒤 월세 공장을 얻었다. 손 사장은 “창업 당시엔 직원도 없이 혼자서 쇠를 깎고 영업하는 1인 회사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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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근속자도 우진정밀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손 사장은 “우리 직원들은 대개 10년 이상 근속자들”이라며 “이들의 손끝에서 정밀가공제품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우진정밀의 제품은 5~10마이크로미터(㎛)의 공차를 유지하는데 이런 정밀가공능력은 첨단설비 못지않게 직원들의 숙련도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더불어 사는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 손 사장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매출과 이익이 생기면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이런 노력이 직원들의 애사심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웃 기업인들과 봉사단체를 설립해 영등포 쪽방촌을 돕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불우이웃돕기성금을 기탁하기도 한다.

손 사장은 한국소공인진흥협회 문래지회장을 맡아 문래동 머시닝밸리를 널리 알리는 데 발벗고 나서고 있다. 문래지회 회원만 45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이 지역 소공인이다. 기업들의 공통 관심사를 논의하고 발전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문래동에 애착이 있는 것은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손 사장은 문래동이 안고 있는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일감 확보다. 그는 “소공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감”이라며 “우수한 금속가공기술을 가진 문래동 소공인들이 일감을 따낼 수 있도록 전국 각지를 뛰어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소공인들을 방문해 이들이 어떤 식으로 불황을 돌파하는지 파악했고, 국내 각지의 전시회를 찾아 문래동을 알리고 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손 사장은 올해 초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둘째, 금속 가공일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적다는 점이다. 손 사장은 “아무리 불황이라고 해도 문래동 기업 중에는 일손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젊은이들이 좀처럼 선반 밀링 프레스 등 금속 가공일을 배우려고 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무직에 종사한 사람은 50대에 퇴직해 노는 사람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환갑이 넘어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며 “문래동에 와서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가 늘어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셋째, 재개발 시 경영이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손 사장은 “문래동은 건물이 너무 낡아 어차피 재개발이 돼야 하는데 이 지역에 아파트형 공장을 짓는다 해도 공사기간에 사업을 단절 없이 지속하려면 서울 인근에 적당한 부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지역 소공인들은 주로 동네 인력을 활용하고 있어 지방으로 옮기기엔 무리가 있다”며 “서울 인근 적당한 곳에 문래동 ‘뿌리기업’들이 옮겨가서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해줄 것”을 희망했다.

그는 “문래동 머시닝밸리(금속가공집적지)로 불리는 이 지역에는 1300여개 업체가 있지만 인근 양평동이나 신도림동을 합칠 경우 이 지역 소공인은 2500개가 넘는다”며 “이들은 똑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기 때문에 공통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인 및 정부 관계자와 지속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