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영재’의 나라다. 지난해 기준 영재교육 대상자가 11만명에 달한다. 2003년 2만명에서 5배 이상 늘었다. 과학분야 국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할 대표선수 선발 경쟁률은 100 대 1을 훌쩍 넘기 일쑤다. 영재 테스트를 업(業)으로 삼는 학원도 성업 중이다. 서울 강남 전문학원에선 한 번 테스트를 받는 데 100만원이나 하지만 대기표를 뽑아야 할 정도다. 하지만 이 숫자들엔 함정이 있다. 한국에서 영재란 ‘창의적인 인재’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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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재포럼 2016] 국제올림피아드 수상자 절반 의대로…한국선 '영재≠창의인재'
◆넘쳐나는 ‘무늬만 영재’

지난달 말 발표된 국제지구과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기록했다. 화학올림피아드에선 지난 8년간 금메달 23개를 땄다. 네 명이 화학 영역의 각 부문에 출전하면 세 명 정도는 금메달리스트가 된다. 표면적으론 괄목할 만한 성과다. 그런데 정작 참가 학생을 지도하는 대학교수들은 ‘속 빈 강정’이라고 털어놓는다. 수상자의 절반 이상이 의대에 진학하는 현실 탓이다. 나머지도 대부분 해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화학올림피아드의 ‘대모’로 불리는 하윤경 홍익대 기초과학과 교수는 “매년 300명가량의 지원자 가운데 네 명을 선발해 국제대회에 출전시킨다”며 “(의대 진학에) 처음엔 섭섭했는데 점점 당연시되는 터라 이젠 서운한 감정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과 목동 등지에선 ‘멘사(고지능자의 모임)’ 회원이라는 꼬리표가 대학입시에 필요한 ‘스펙’으로 둔갑했다. 대학 입학사정관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멘사 인증을 받기 위한 학원 프로그램까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만들어진 영재’의 양산이 불러온 부작용은 3년 단위로 측정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2015년 수치는 올해 말 공개 예정)에서도 나타난다. 2013년 말 발표된 과학분야 성취도 평가에서 한국은 영재 보유 기준 세계 4위(65개국 기준)였지만 최종 단계인 ‘레벨 6’ 학생 비중은 1% 밑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1%)에도 못 미쳤다. 싱가포르(5.8%) 상하이(시 단위로 참가, 4.2%) 일본(3.4%) 핀란드(3.2%)가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영국 홍콩 에스토니아 폴란드 독일도 1~3%가량이었다. 한국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하 교수는 “문제풀이에만 익숙한 한국 영재교육의 비극”이라고 탄식했다.

◆창의인재 못 키우는 대학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창의인재를 길러내는 토대인 융·복합 교육은 먼 나라 얘기다. 미국은 제조업 경쟁력 쇠퇴로 골머리를 앓던 2000년대 초·중등 교육단계에서부터 과학 정보기술 공학 수학을 종합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STEM 교육’을 시작했다. 지난해 10월엔 여기에 컴퓨터과학을 포함하는 법안을 제정하기도 했다. 인공지능(AI) ‘알파고’로 유명한 딥마인드의 창업자들도 STEM 교육의 수혜자로 알려졌다. 독일도 별도 법안까지 마련해 MINT(수학, 정보, 자연과학, 테크놀로지의 융합) 교육을 의무화했다.

이에 비해 국내에선 ‘따로따로’ 법안만 양산되고 있다. 1976년 발표된 과학교육진흥법 외에 최근 들어 미래창조과학부는 소프트웨어교육지원법, 수학교육계에선 수학교육진흥법 제정을 각각 추진 중이다. 학계에서 “개별교과마다 별도의 진흥법을 제정하려는 교과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대학 역시 창의인재들이 꿈을 키우는 공간으로는 역부족이다. 2014년부터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과학영재들이 의대에 가려 한다고 학생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고 했다. “영재들이 소위 명문대에 진학해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1학년 때 강의실에서 잠만 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싱가포르난양공대(NTU)가 2011년 도입한 ‘르네상스엔지니어링프로그램’이라는 융·복합 실험을 주목할 만하다고 입을 모은다. 공대생을 대상으로 한 문·이과 통합 교육 시스템이다. 기술적인 지식에만 매달리는 공대 교육에서 벗어나 공학, 과학, 경영, 산업공학, 그리고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전인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목표다. 기간은 4.5년으로 졸업 후 학위도 두 개를 받는다.

박동휘/이상엽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