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부산신항만의 한진해운 터미널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거의 중단됐다. 김태현 기자
2일 부산신항만의 한진해운 터미널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거의 중단됐다. 김태현 기자
금융당국은 대주주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해운산업을 지키고 키워야 할 해양수산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했다.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고 이끌어야 할 기획재정부와 청와대는 수면 아래로 숨었다. 누구도 총대를 메지 않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게임’의 결말은 한국 1위, 세계 7위 해운사 한진해운의 몰락이었다.

◆“내 일 아니다”는 정부

해운 구조조정에 해수부는 없었다…'복지부동'에 한진해운 침몰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에 5조원대 부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산업은행은 ‘조선업 정상화 지원단’을 출범시키는 동시에 자금 지원 규모와 방식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관계부처 장관들의 비공식 회의인 ‘서별관회의’도 여러 차례 열었다. 채권단은 3개월 뒤인 지난해 10월 4조2000억원을 대우조선에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 3개월 동안에는 다른 장면이 연출됐다.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이동걸 산은 회장은 “대주주의 자구노력 없이는 추가 지원을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진해운이 용선주와 용선료 인하 협상을 할 때 한국 정부의 지원 의지를 담은 편지를 부탁하자, 금융위는 2주나 지나 작성해줬다는 게 해운업계 전언이다. 업계 관계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테니 한진해운을 살려만 달라’고 호소했으나 정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며 “한진그룹과 정부의 힘겨루기가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해운 구조조정에 해수부는 없었다…'복지부동'에 한진해운 침몰
유일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 6월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를 자임했지만, 이후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윤증현 전 장관이 “유 부총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으나 바뀐 것은 없었다. 청와대는 해운 구조조정이라는 말만 나오면 “모르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해수부는 “구조조정은 금융위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했다. 김영석 해수부 장관은 6월 이동걸 회장에게 “채권단이 추가 자금을 지원해주었으면 한다”는 전화를 했지만 이 회장이 거부하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김 장관은 조양호 회장을 2~3차례 만나 대주주의 추가 지원을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는 “김 장관은 올해 초 대통령 업무보고 때 어묵과 김 수출 방안을 집중 보고하면서 해운산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우조선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정부의 이런 소극적 대응은 ‘대우조선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부실 기업 지원에 비판과 질책이 이어지자 공무원들이 몸을 사렸다는 얘기다. 야권은 한동안 대우조선 지원 결정 당시의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을 청문회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는 “정책적 판단을 내린 이들에 대해 추후 결과를 보고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겠느냐”고 말했다. ‘제2의 변양호 신드롬’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대우조선 파산과 한진해운 파산이 정권에 주는 부담의 크기가 다르다 보니 정부의 태도가 상반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대우조선이 문을 닫으면 4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1000개의 기자재업체가 함께 도산할 가능성이 높다. 여권에서는 “대우조선 사태가 차기 대선 승패를 가를 수 있는 PK(부산·경남)지역 민심을 흔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한진해운의 고용 규모는 1900명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 방향을 정하면서 정치적 계산을 하다 보니 전형적인 굴뚝기업인 대우조선은 수조원을 투입해 살리고, 국가 기간산업체인 한진해운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류대란에 뒷북 대책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가능성이 제기된 게 3개월 전인데도 정부가 물류대란 대책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해수부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결정되고 나서야 해운·항만 대응반 비상대책 회의를 열었다. 운항 중단된 한진해운 노선에 현대상선의 대체선박을 투입하는 결정도 그 이후에 이뤄졌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수부는 설마 채권단이 한진해운을 법정관리에 보내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대체선박 마련과 선박 억류 문제 등에 대한 사전준비가 철저했다면 지금의 물류 마비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류업계 관계자는 "한진해운 스스로 법정관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상 운송 계획 등을 마련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필요한 내부 유동성을 갖추지 않아 많은 화주들에 피해를 입혔다"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법정관리 신청 시점을 잘못 잡았다"고 지적했다.

안대규/도병욱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