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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가을 시 한 편

입력 2016-09-02 17:42:34 | 수정 2016-09-03 03:45:45 | 지면정보 2016-09-03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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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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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

조지훈의 ‘추일단장(秋日斷章)’ 첫 부분이다. 가을 문턱에서 산과 구름,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인의 눈길은 마당귀와 장독대를 거쳐 마루 끝과 방안으로 천천히 옮겨간다.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 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북어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잔/ 뜰에 내려 영영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먼지 앉은/ 고서(古書)를 읽다가…’

그 사이로 지난날의 안타까움과 격정의 순간들이 따라 흐른다. 연이은 상념 속에선 성숙의 계절 끝에 곧 만나게 될 겨울 눈발을 예감하기도 한다.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파초를 캐어 놓고/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간/ 격정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어달린/ 붉은 감 하나// 성숙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온다.// 팔짱 끼고/ 귀 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고즈넉한 가을 풍경 위에 생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겹쳐놓는 시인의 손매가 정결하다. 애틋한 옛일이나 소낙비 같은 격정의 세월을 다 잊고 홀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 성스럽다. 가을낮의 서정은 이렇듯 고요하고, 또 약간은 쓸쓸하다. 낙엽 지는 소리는 어떤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방울로 잘못 알고 밖에 나가보라 했더니 시냇가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 있었더라던 송강 정철의 옛시는 한 폭의 수묵화다.

가을밤의 정취 또한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조용미 ‘가을밤’)고 노래할 정도다.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보다’(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을은 독락(獨樂)의 계절이다. 릴케도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며 내면의 고독을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한들 또 어떠리. 번잡한 세상사 훌훌 털고 온갖 시름도 다 내려놓고 혼자 들길을 고요히 거닐 일이다. 들판의 알곡들이 저마다 홀로 여물어가는 소리도 들으면서.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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