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50여년 전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살던 국가다. 필리핀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 건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1965년 집권하면서부터다. 그가 1986년까지 장기 집권하는 동안 필리핀 경제성장률은 동남아시아 주요 5개국(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평균에도 못 미쳤다. ‘아시아의 병자’라고 불린 것도 마르코스가 남긴 불명예다. 그러던 필리핀이 올해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로 떠올랐다. 지난 2분기 필리핀 경제성장률은 7%를 기록했다. ‘세계의 경제 엔진’으로 불리던 중국(6.7%)을 추월했다.
[글로벌 뉴스] '아시아의 병자' 필리핀, 연 7% 성장 '경제 우등생' 됐다
아키노 대통령 “성장이 우선”

병들어 가던 필리핀 경제에 숨을 불어넣은 건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전 대통령이다. 2010년 집권한 아키노 대통령은 6년간 경제 살리기에 집중했다. 외국인 투자 유치와 인프라 투자 확대 등을 통해서다. 아키노 대통령 집권 시절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는 꾸준히 늘었다. 집권 초인 2010년 10억7000만달러(약 1조2000억원)이던 FDI는 지난해 57억달러로 뛰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또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인프라 투자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렸다.

마르코스가 망쳐 놓은 필리핀 경제를 살린 아키노 전 대통령이 마르코스에게 저항한 정치 가문의 후예라는 것도 흥미롭다. 아키노 대통령 집권기였던 2010~2014년 필리핀의 평균 GDP 증가율은 6.3%에 달했다.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를 비롯해 무디스, 피치 등 신용평가회사는 아키노 정부 시절 필리핀의 국가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기준인 BB, Ba3에서 투자적격 기준인 BBB-, Baa2 등으로 올렸다.

중국·원자재 의존도 낮아 유리

필리핀 마닐라의 야경.
필리핀 마닐라의 야경.
과거 필리핀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해외로 갔다. 이들이 해외에서 벌어 송금한 외화가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외신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송금되는 외화의 증가율은 연 20%가 넘었다. 하지만 필리핀 경제가 되살아나자 이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중국 의존도가 낮은 것도 필리핀 경제 구조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은행 나티시스에 따르면 필리핀 GDP에서 대(對)중국 수출, 중국의 직접투자 등 중국과의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국제 유가가 크게 떨어진 것도 성장 요인으로 꼽힌다.

두테르테, 아키노 경제 기조 이어받아

필리핀 경제 부활을 이끈 아키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도 필리핀 경제 성장세가 이어질 수 있을까. 시장의 관심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행보에 쏠려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당선 직후 어떤 경제 정책도 내놓지 않아 투자자의 불안감을 샀다.

이 같은 상황을 인식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아키노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 노선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법률가일 뿐 경제에는 문외한”이라며 “범죄와의 전쟁에만 힘쓰고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또 아키노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을 지낸 카를로스 도밍게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인프라 투자 역시 적극 추진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아키노 정부 시절 GDP 대비 5%인 인프라 투자지출을 7%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인프라 투자에 집중하는 건 빈곤 퇴치를 위해서다. 필리핀의 빈곤율은 25.2%에 달한다. 대선에서 아키노 전 대통령이 지지하던 마누엘 로하스 후보가 아니라 ‘이단아’ 두테르테가 승리한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홍윤정 한국경제신문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