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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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만남’을 위해 변창흠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을 만난 건 최악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달 24일이었다. 더운 날씨를 감안한 듯, 그가 기자를 초대한 곳은 냉면집이었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서북면옥’. 대형 쇼핑몰의 입점 제의를 뿌리치고 49년째 한자리에서 평양냉면 맛을 이어온 집이다. 구의사거리에 소박하게 자리잡은 가게는 저녁식사하기엔 이른 시간임에도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가게 앞엔 손님 대기 줄이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경미 서북면옥 사장이 10년 넘은 단골을 반갑게 맞았다. 변 사장은 “세종대 교수 시절부터 다닌 집”이라며 “직접 방문해 인터뷰 장소로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당일엔 답을 못 받고 다음날에야 ‘윤허’를 받았다”며 웃었고, 이 사장은 “10년 넘게 봐온 단골손님이 이런 인터뷰를 할 정도로 높은 사람인지 몰랐다”며 너스레로 받아쳤다.

경제학도에서 도시계획학자로

먼저 수육과 만두가 나왔다. 수육은 촉촉하면서도 부드럽고 만두는 투박한 모양새지만 베어 물면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 퍼졌다. 만두피가 두꺼운 편이지만 텁텁하지 않았다. 야채와 고기, 두부가 적당히 어우러진 만두소에서는 풍부한 육즙이 배어나왔다. 젓갈을 많이 쓰지 않아 시원한 맛의 김치도 이 집의 자랑이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변창흠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1980년대 부동산 광풍 보며 도시계획가로 변신한 경제학도
경북 의성 출신인 변 사장이 도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때다. 현장과 현실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에게 전공인 경제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학문 같아 답답했다고 했다. 1983~1985년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면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레 ‘땅’으로 쏠렸다. “경제의 3대 요소는 토지·노동·자본인데, 왜 경제학에서 토지는 가르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토지를 더 연구하기 위해 부동산 관련 강의가 있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했고, 시골 출신이어서 자연스럽게 지역균형발전을 연구하는 지역개발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그 덕분에 개별적인 부동산보다 도시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게 됐죠.”

박사과정을 마치고 결혼하자 바로 첫째 아이가 생겼다. 생계를 꾸려야 했던 그때, 마침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의 민자유치사업 도입을 앞두고 연구원을 뽑고 있었다. SOC 관련 논문을 준비하던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자리였다.

그의 첫 임무는 서울시 민자유치 1호 사업인 우면산 터널이었다. SH공사가 참여하지 않으면 시공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그의 논리가 받아들여져 SH공사가 사업 지분 25%를 갖게 됐다. “우면산 터널은 실수익 8.8%로 SH공사가 출자한 사업 중 유일하게 흑자를 냈습니다. 지난해 제가 SH공사 사장으로서 이 지분을 팔기로 결정했는데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공익성을 실현하기 위해 사업 재구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주간회의 50회…상암DMC 뼈대 마련

[한경과 맛있는 만남]  변창흠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1980년대 부동산 광풍 보며 도시계획가로 변신한 경제학도
변 사장이 “(2014년 10월) SH공사로 자리를 옮기고도 이 맛을 잊지 못해 두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온다”며 추천한 물냉면이 나왔다. 매일 주방에서 직접 메밀가루를 빻아 면을 뽑는다는 이 사장의 자부심 가득한 설명대로 면은 메밀의 거친 질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면발은 잘 끊어지면서도 탄력이 있고,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배어났다. 평양냉면치고 육수가 진한 편이어서 초보자도 쉽게 즐길 수 있다.

SH연구원에서 우면산 터널 사업을 마무리한 뒤 맡은 학여울역 인근 벤처타운 사업은 성사되지 못했다. 관계기관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겪다 결국 백지화됐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일에 쫓겨 후순위로 밀려난 박사 논문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가 됐다고 판단해 연구원을 떠났다.

1999년 논문을 마무리하고 이듬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지금의 서울연구원)에 자리잡았다. 그는 연구팀장으로서 첨단 디지털 미디어와 문화 엔터테인먼트산업 집적지인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조성 사업을 주도했다.

변 사장이 “새벽 6시 출근해 밤 12시까지 정말 신나게 일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고건 시장부터 박원순 시장까지 10년 넘게 DMC 사업의 ‘워치독(감시견)’으로서 필지매각 기준 마련과 심사, 시공업체 선정 실무작업, 건축물 심의 등 모든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DMC는 중심상업지역을 민간에 입찰이 아니라 평가를 통해 판매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투기를 목적으로 들어오려는 개발업자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죠. 부지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만큼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업종이 70% 이상을 구성하고 1층을 시민의 보행공간으로 공개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밀어붙였죠.” 흔들리지 않을 DMC 개발 뼈대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 부시장 주재 토요회의를 50차례 넘게 열었다고 말했다. DMC 설계를 맡은 매사추세츠공대(MIT)가 DMC를 우수 업적으로 세계 각국에 알려준 덕분에 두바이, 영국 등에서도 참고 사례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 가치 높이는 공공 디벨로퍼

박원순 시장에게 정책조언을 해온 그는 2014년 SH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첫 직장이던 SH공사의 수장으로 돌아온 그가 제시한 비전은 도시 재생과 주거복지 서비스 전문기관. 일본의 롯폰기힐스를 개발한 모리빌딩,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를 개발한 싱가포르도시개발청(URA)처럼 도시 가치를 높이는 ‘공공 디벨로퍼’의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는 기성 시가지를 다시 잘 쓰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고덕·강일, 창동·상계 등 서울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지를 개발하는 데 SH공사가 직접 참여해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재생사업을 주도하려 합니다. 지난해 SH공사를 시유지 관리기관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창동·상계지역에 대해 “서울 북부지역의 유일한 도심지로서 이 지역의 몇 백만명 주민에게 일자리와 생활 인프라를 제공하는 거점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강남·북의 균형발전을 이끌 수 있는 재생테마를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변 사장은 “공공 디벨로퍼는 민간의 일을 뺏는 게 아니라 민간에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SH공사가 참여하는 사업은 민간에서 풀지 못한 것들입니다. 사업성이 떨어져 15년째 사업이 진척되지 못한 관악구의 강남아파트, 전통시장 4곳 등이 있어 이해관계가 복잡한 강동구 천호1구역 등이 대표적이죠. 정책조율을 공공에서 맡아 리스크를 줄이고 민간의 활동범위를 확보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은 오히려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SH공사가 주도하는 임대사업은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모범사례로 삼고 교류를 자청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변 사장은 “우리는 건설회사가 아니라 주거복지기관”이라고 강조했다. “집만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지원해야 합니다. 주요 기관,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주거서비스를 강화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임기 반환점을 돈 그는 도심의 저층 주거지를 재생하는 모델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재개발 뉴타운구역에서 해제된 낡은 저층주거지를 서울의 새로운 주거단지로 바꿔 서울의 새 얼굴을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학자는 ‘이게 이래서 좋다’는 당위성만 생각하면 되지만 사업가는 이해관계자들에게 ‘우리가 이런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걸 제시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손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지역주민, 지역자치단체장, 정치인 모두를 아우르는 인센티브를 제시하고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모델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서울주택도시公 새출발
도시재생·주거복지 집중


서울시 산하 주택·부동산 공기업 SH공사는 1일 사명을 서울주택도시공사로 바꾸고 주거복지·도시재생 전문공기업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서울주택도시공사는 이날 개포동 본사에서 변창흠 사장과 이제원 서울시 행정2부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회사명이 적힌 표지석 제막식을 열었다.

회사명을 변경한 것은 노후 주거 지역에 대한 재생사업을 주도하는 공공 디벨로퍼(부동산개발업체) 역할을 강화하고 공공임대주택 입주민에게 차별화된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SH공사 브랜드가 일반인에게 익숙한 점을 감안해 대외 홍보활동에 옛 회사명도 함께 사용할 계획이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변창흠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1980년대 부동산 광풍 보며 도시계획가로 변신한 경제학도
변창흠 사장의 단골집 서북면옥
직접 뽑은 메밀면에 담백한 육수…49년 이어온 평양냉면 전문점

[한경과 맛있는 만남]  변창흠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1980년대 부동산 광풍 보며 도시계획가로 변신한 경제학도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평양냉면 전문점 서북면옥은 1968년부터 49년째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장인 이경미 씨가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2대째 가게를 이어오고 있다. 어린이대공원 남문에서 구의사거리 방향으로 5분가량 걸어가면 예스러운 간판을 단 가게가 나온다.

메뉴는 물냉면, 비빔냉면, 온면, 만둣국, 수육(소고기), 편육(돼지고기), 접시만두로 이뤄졌다. 메밀을 직접 갈아 만든 면과 소고기, 양파, 마늘, 배 등으로 우려낸 깔끔한 육수가 어우러진 물냉면이 일품이다. 잘게 썬 야채와 고기, 포슬포슬한 두부로 꽉 찬 접시만두는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 그날그날 내놓는다.

‘정말 좋은 맛은 담백한 맛이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대미필담(大味必淡)이 쓰인 현판을 식당 입구에 걸어놨다. 담백하고 소박한 맛을 손님들에게 내놓겠다는 이 사장의 뜻이다.

물냉면, 비빔냉면, 온면, 만둣국 등 식사류는 모두 8000원이다. 수육과 편육은 각각 한 접시에 1만5000원과 1만원이다. 접시만두는 한 접시에 8000원이다.

조수영/홍선표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