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덥긴 정말 덥네요. 얼른 들어갑시다. 이 집 해장국이 끝내줍니다.”

폭염이 절정이던 지난 10일 제정부 법제처장을 만났다. 장소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태진복집. 30년 가까이 다닌 단골집이라고 했다. 그는 복지리(맑은 탕)를 소개하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매운탕은 너무 자극적이란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복지리. 청와대에 파견 나간 기간을 빼면 사무관에서 처장(차관급)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법제처를 떠난 적이 없는 그의 34년 공직생활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법제처장으로 임명돼 지금까지 변치 않는 신임을 얻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9년간 일하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 등 3개 정권을 경험했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꾸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구수한 입담에 담긴 장수(長壽) 공무원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사이 오후 7시에 시작한 3시간 가까이의 인터뷰가 후딱 지나가버렸다.

방황했던 대학생활…교수님의 한마디

제 처장은 “이 주변의 술 많이 먹는 사람들이 해장하러 오는 집”이라며 “광화문 정부청사와 청와대에서 근무할 땐 아침에 개시도 안했는데 문을 두드려 해장 복지리를 먹곤 했다”고 말했다. 밑반찬에 섞여 나온 복껍질무침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물자 참복과 미나리 향이 코로 밀려들어왔다. 제 처장은 경남 고성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아대 법대를 나왔다. 요즘 말로 ‘흙수저’에 ‘지방대’ 출신이다.

공직에 뜻을 둔 계기를 묻자 그는 “재수 끝에 대학에 갔는데 삼수를 생각할 정도로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엔 입학 성적이 좋으면 고시반에 들여보냈어요. 하지만 고시반에 들어가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했죠. 어느날 여느 때처럼 늦게 고시반에 나갔는데 ‘제정부, 교수연구실로’라는 쪽지가 자리에 놓여 있더군요.”

그날 지도교수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했다. “서울 올라간 느그 친구들이 지금 니처럼 팽팽 놀고 있을 줄 아나. 마음에 안 들어도 대학 들어왔으면 정신 차리고 두 배 세 배 해야 할 거 아이가.” 그때부터 공부에 매진해 1982년 행정고시(25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연수 후 법제처를 근무지로 택했고 1989년 결혼했다. 나이 서른넷이었다. 그는 “가족에게는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공직자 남편과 아버지를 둔 탓에 가족들이 희생한 게 많았다는 얘기다.

“처가가 교육자 집안이에요. 아내는 아직도 현직 초등학교 교사인데, 또래들이 교감 교장을 하는 지금도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아이들 가르치는 게 좋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휴직을 자주 한 탓인 것 같아 미안하죠. 가만 생각해 보니 애들 졸업식 입학식 때도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네요. 외할머니, 이모랑 찍은 사진은 많은데…. 그래서인지 요즘은 얘들한테 어디 같이 가자고 하면 ‘엄마하고 가세요’, 하네요. 허허.”

보기만 해도 정갈한 맛이 느껴지는 복지리가 나왔다. 이 집 복지리의 특징은 조미료는 물론 콩나물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콩나물을 넣으면 시원한 맛이 나기는 하지만 참복 특유의 담백함은 사라진다는 설명이다. 그 말대로 국물이 담백해 숟가락이 자주 갔다.

제 처장은 청와대에서 9년간 근무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인 청와대에서 오래 일하기 위해 줄을 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제 처장은 “보통 방법으로는 못 나올 것 같아 프랑스 유학 시험에 세 번 합격했지만 주변의 만류를 이기지 못해 모두 포기했다”고 했다. 또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계속 남아 도와 달라는 걸 겨우 뿌리치고 법제처로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신뢰를 얻는 비결이 뭘까. 제 처장은 ‘미리 파악하고 준비하는 자세’를 꼽았다. “청와대 일이라는 게 갑작스레 벌어지는 게 많은데, 그때 대비가 안돼 있으면 일 처리가 힘들어집니다. 언론 보도나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어떤 문제가 법률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 검토해 사전에 보고하거나 일이 터지자말자 즉시 보고하면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요. 법제처장을 오래하는 것도 그때의 습관과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철밥통’ 마인드로는 공직서 성공 못해”

[한경과 맛있는 만남] 제정부 법제처장, 지방대 출신 '흙수저 청년'…"34년 공직생활 장수비결요?"
청와대 근무 경험은 그가 공직에서 ‘롱런’하는 계기가 됐다. 노태우 정부 때는 민주화 입법을 야당과 조율하며 시대 흐름을 읽었다. 국가원수 모독죄를 삭제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질서유지인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업무가 대표적이다. 그는 “노태우 정부 때는 권위주의 법률을 많이 없앴고, 김영삼 정부 때는 선거 부정을 막는 법률 도입 실무를 맡았다”며 “보람도 컸고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시야를 갖췄던 것 같다”고 했다.

스스로 평가하는 34년 공직생활은 어떨까. 그는 “법제처에서 시작해 법제처장까지 올랐으니 ‘행운아’라고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후배들이 내 길을 많이 따라와줬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자신의 출세만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에는 외부 출신이 법제처장을 많이 했습니다. 판사나 검사, 심지어 군(軍) 출신도 있었죠. 제가 31대 처장인데 법제처 사무관부터 올라온 사람은 저를 포함해 네 명뿐입니다. 저 같은 사례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내부 출신이 처장을 하면 인사청탁도 사라집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없는데 어떻게 청탁을 받고 불이익을 줍니까. 처장이 일을 다 꿰고 있으니 직원들이 열심히 할 수밖에 없고요.”

마지막으로 나온 이 집의 별미 복튀김을 먹으며 공직자를 꿈꾸는 이들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 물었다. 짭쪼름한 튀김옷과 쫄깃하고 담백한 참복 살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제 처장은 공무원이 ‘철밥통’이기 때문에 지원한다는 자세로는 시험에 합격할 순 있어도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는 민간기업의 인사 방식이 공직사회에 속속 도입될 것이기 때문에 복지부동 자세로는 도태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낡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확고한 공직관까지 갖고 들어온다면 공직사회에 활력이 생기고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민법 개정안의 20대 국회 통과”라고 대답했다. 일반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법인 민법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로 가득차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통정’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었다. 언뜻 정(情)을 통한다는 뜻인 것 같지만 ‘서로 짜고 거짓으로 한’이라는 의미다. 법제처는 지난 19대 국회 때 이 같은 용어들을 대부분 고친 민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결국 처리되지 못하고 회기 말 폐기됐다.

제 처장이 본 전직 대통령은…
노태우 '안전'…YS '개인기'


제 처장은 공직생활 초기이던 1989년 청와대에 파견 나가 법률비서관으로 9년을 일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부터 김영삼 정부 전체 기간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 몇 달까지 포함하면 3개 정부의 청와대를 경험했다.

대통령들의 특징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은 그는 “연설문이나 말씀자료를 써서 올리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80~90%는 자료 그대로 읽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50%만 인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채웠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로서는 아무래도 힘이 좀 덜 나는 게 있는데, 그 또한 그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연설이나 발표 때 노 전 대통령은 ‘안전’하게 간 반면 김 전 대통령은 ‘개인기’를 발휘했다는 의미였다.

제정부 처장의 단골집 '태진복집'
메뉴는 복지리·복튀김·복사시미 단 3개…담백한 맛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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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태진복집은 1988년부터 29년째 이어오고 있다. 사장인 김진옥 씨가 20대 후반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메뉴는 복지리, 복튀김, 복사시미 딱 세 개다. 매운탕은 참복의 맛보다 양념 맛이 강하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다. 그만큼 싱싱한 복을 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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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를 비롯해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 재료가 좋으면 맛은 나오게 돼 있다는 게 김 사장의 지론이다. 소금은 짜지 않은 전남 신안 토판염을 쓰고 배추는 충북 괴산에서, 고춧가루는 강원 양양에서 가져온다.

모든 요리는 주방장 없이 사장이 직접 한다. 복지리는 1인분 3만5000원, 복튀김은 중(中)이 8만원, 대(大)가 12만원이다. 복사시미는 시가로 판매한다.

■ 제정부 법제처장 약력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1975년 마산고 졸업
△1980년 동아대 법대 졸업
△1982년 동아대 대학원 법학석사
△1982년 25회 행정고시 합격
△1983~1989년 법제처 행정사무관
△1989~1998년

대통령 법률비서실 행정관

△1998~2004년 법제처 법제관
△2004~2005년 법제처 법제심의관
△2005~2010년 법제처 국장
△2010~2011년 법제처 기획조정관
△2011~2013년 법제처 차장
△2013년~ 제31대 법제처장

박한신/고윤상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