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열즉보천열(熱卽普天熱) 한즉보천한(寒卽普天寒)
늦더위가 여전하다. 두 발이 유일한 이동수단이던 시절, 부채 외에 더위가 없는 곳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독서삼매였다. 11세기 남송시대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도 더위 때문에 할 수 없이 좋아하는 금강경을 펼쳤다. 1년 내내 만년설로 덮여있는 수미산(須彌山)이 등장하는 문장을 만나자 더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더위는 잊혀졌고 책에 나오는 눈바람까지 상상으로 즐겼다. 그 느낌을 낙서처럼 두 줄의 시로 남겼다. 결국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덕일 선생은 ‘더위란 임금님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임을 자료로 고증했다. 일득록(日得錄)에 따르면 1783년 여름 무더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조(正祖)가 머물던 관물헌(觀物軒)은 협소하고 좌우에는 담장까지 바짝 붙어있는 소박한 거처인 까닭에 한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보다 못한 규장각 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서늘한 별전(別殿)으로 옮길 것을 완곡하게 아뢰었다.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서늘한 곳으로 옮긴다면 결국 거기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다시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떴다. “이를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

더위를 이겨낼 별다른 재간이 없던 시절에는 부채질을 하거나 독서로 견뎠다. 하긴 더위만 피할 목적이라면 심산유곡으로 가면 된다. 그것도 양에 안차면 시베리아 지방으로 몸을 옮기면 간단하다. 하지만 덥다고 얼음골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생활공간을 완전히 떠난 피서란 불가능한 까닭이다. 결국 생업의 현장에서 땀나는 일상에 전념하면서 더위를 피하고자 하니 짜증나는 것이다. 정답은? 참을 수밖에 없다. 본래 ‘사바세계’란 참지 않고선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의미다. 이제 에어컨 선풍기 힘으로 조금만 더 버틴다면 곧 가을이 오리라.

원철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