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가 된 '위기 경영'…4대 그룹, 필요한 곳만 '투자 화력' 쏟는다
#1. SK그룹은 요즘 위기와 혁신을 강조한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 6월30일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 놓고 ‘돌연사(sudden death)’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그룹의 체질 개선을 주문했다. “혁신의 속도가 느리거나 강도가 약하면 글로벌 시장의 강자에게 한 방에 나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2.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달 초 러시아, 슬로바키아, 체코의 현대·기아차 공장을 긴급 점검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이후 유럽 시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직접 상황 점검에 나섰다. 귀국 후 해외 법인장 60여명을 긴급 소집해 “어려운 외부 환경은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며 또다시 혁신을 강조했다.


재계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삼성, 현대·기아차, SK, LG 등 4대 그룹 모두 마찬가지다. 세계 경기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브렉시트, 미국 금리 인상 전망, 환율 급변, 중국과의 사드(THHAAD·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계) 갈등 등으로 경영 환경이 불투명해진 탓이다. 기업들은 위기 돌파를 위해 ‘혁신 또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상수가 된 '위기 경영'…4대 그룹, 필요한 곳만 '투자 화력' 쏟는다
◆불안불안한 실적

재계의 위기감은 올 상반기 성적표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현대·기아차는 올 상반기 차량 판매가 줄었다. 국내외 차량 판매는 총 385만대가량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4% 줄었다. 반면 글로벌 경쟁사들은 대부분 올 상반기에 판매량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도요타(0.3%), 닛산(1.6%), 혼다(6.7%) 등 일본 자동차 업체는 물론 BMW(5.8%), 다임러(6.6%), 포드(4.6%), 심지어 연비 조작 파동을 겪은 폭스바겐(2.9%)마저 판매량이 늘었다. 정 회장이 긴급 현장 점검에 나선 배경 중 하나다.

SK는 에너지, 통신, 반도체 등 그룹의 핵심 삼각편대가 성장 정체에 빠졌다. SK텔레콤은 내수시장에 갇혀 ‘우물안 개구리’ 신세다. SK하이닉스는 올 상반기 실적이 대폭 뒷걸음질쳤다. 중국의 D램 시장 진출이 가시화하고 있는 가운데 신성장 동력인 낸드플래시 분야에선 선두 삼성전자와 기술 격차가 크다. SK이노베이션이 올 상반기 2조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정제마진(석유제품 가격-원유 도입 단가) 개선에 따른 ‘알래스카의 여름(짧은 호황)’이 오래갈 순 없다는 게 그룹 내 인식이다.

LG는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이 좀처럼 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LG전자가 올 상반기 1조원대 영업이익을 회복했지만 스마트폰 부문은 존재감이 미약하다. LG디스플레이는 작년 상반기 영업이익이 1조2000억원을 넘었지만 올 상반기에는 800억원대로 위축됐고 LG이노텍은 아예 적자를 냈다.

삼성은 ‘삼성전자 쏠림’이 심하다. 미국 애플과 중국 샤오미에 끼여 설 자리가 좁아지는 듯하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전의 실마리를 찾은 데 이어 올해 갤럭시S7과 갤럭시노트7이 히트하면서 분위기가 괜찮다. 하지만 삼성전기, 삼성SDI 등 다른 전자 계열사들은 실적이 대폭 감소하면서 울상을 짓고 있다.

◆투자는 성장 사업에 집중

위기 돌파를 위해 4대 그룹은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는 꼭 필요한 곳에 ‘정밀 타깃’ 식으로 하는 모양새다. 올 상반기를 보면 이런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4대 그룹의 올 상반기 투자액은 19조1823억원으로 전년 동기(30조875억원)에 비해 10조9052억원(36.2%)이나 줄었다. 불확실한 경영 환경 탓에 기업들이 몸을 사린 것으로 풀이된다. 하반기에도 이런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8조8000억원보다 두 배가량 많은 17조원 이상을 투자할 예정인데 대부분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3차원 낸드플래시와 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에 투자를 집중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합병(M&A)도 필요한 부분을 찾아 맞춤형으로 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 시장에서 제네시스로 고급차 시장을 공략하는 동시에 세계 주요 시장에서 친환경차를 앞세워 미래에 대비할 방침이다.

SK는 M&A와 함께 위험 요인을 줄이면서 해외시장을 넓히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글로벌 파트너링(합작)’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LG그룹은 자동차 부품, 태양광, 2차전지 등 신성장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LG화학이 올해 2차전지에 8000억원가량을 투자하고, LG전자가 구미 공장에 2018년 상반기까지 5200억원 정도를 투자해 고효율 태양광 모듈 사업을 키우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