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스강을 가로지르는 스위스 루체른의 카펠교를 배경으로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로이스강을 가로지르는 스위스 루체른의 카펠교를 배경으로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위풍당당한 알프스 고봉들이 한 농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큰 갈퀴를 든 농부는 무심한 표정으로 마른 풀을 긁어모으는 중이다. 드넓은 초록빛 들판 위를 걷던 커다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소가 움직일 때마다 목에 매달린 종이 쩔그렁대며 계곡에 울려 퍼진다. 그 뒤에 있는 단조로운 목조건물 한 채가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마침표를 찍는다.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듣자 뭘 이런 걸 찍느냐는 듯 농부가 빤히 바라본다. 그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여행객에게는 찬탄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번잡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스위스의 숨은 모습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을 찾아서

루체른 호수를 건너는 배.
루체른 호수를 건너는 배.
취리히에서 동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는 생 갈렌(St. Gallen)은 아직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놓칠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다. 도시의 기원은 612년에 아일랜드의 수도승 갈루스가 이곳을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생 갈렌이라는 도시명도 이 수도승에게서 비롯됐다. 전설에 따르면 갈루스가 나무로 만든 암자를 지을 당시 곰이 나타나 건축을 도왔다고 한다. 도시 곳곳의 갈루스 관련 조각과 그림에 곰이 함께 보이는 이유다.

스위스의 전통악기인 알펜호른을 연주하는 모습.
스위스의 전통악기인 알펜호른을 연주하는 모습.
생 갈렌에는 고풍스러운 옛 건물이 여럿 남아 있는데 둘러보면 중세시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에 온 듯 비현실적이다. 건물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벽 밖으로 쑥 튀어나온 발코니인 퇴창(oriel window)이다. 당시에는 퇴창의 유무에 따라 집주인의 부를 가늠할 수 있었다. 15세기부터 생 갈렌은 품질 좋은 자수와 레이스 같은 직물을 생산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직물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집에 퇴창을 냈다. 현재 생 갈렌에는 퇴창을 가진 건물이 111개 남아 있다. 집마다 각기 다른 조각을 새겨 넣은 퇴창은 생 갈렌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됐다.

1983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의 생 갈렌 수도원 지구와 부속 도서관은 도시 관광의 하이라이트. 피터 텀(Peter thumb)이라는 건축가가 1755~1768년까지 13년에 걸쳐 지은 대성당에는 천장에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오르간 선율이 울려 퍼지는 대성당에서 장엄한 천장화를 찬찬히 보고 있으니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대성당 뒤편에는 수도원의 부속 도서관(stibi.ch)이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라는데 외관은 평범하다 못해 단순해 보인다. 도서관 입구에는 그리스 문자로 ‘영혼의 약국’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도서관을 영혼을 치유하는 장소에 비유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나 보다.

루체른(스위스) 글·사진= 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스위스관광청 제공생 갈렌 부속도서관
스위스관광청 제공생 갈렌 부속도서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아치 형태의 도서관 천장에는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로코코 양식의 호화로운 나무 장식은 번쩍거리며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미술작품에 가까웠다.

유려하게 굽은 나무책장 안에는 언뜻 보기에도 수백 년은 족히 넘은 듯한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도서관의 보유 장서가 약 17만권에 달하며, 8~15세기까지 수도승들이 직접 필사한 고서만 2100권 정도 남아 있다. 이런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에 생 갈렌은 유럽에서도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근교 드라이 바이에른(Drei Weieren)은 생 갈렌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시내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라서 언제라도 편히 갈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연못은 여름에는 야외 수영장으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쓰인다.

6개국이 한눈에 보이는 샌티스 산
시틀리스알프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시틀리스알프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스위스를 이야기할 때 산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명산의 다채로운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스위스 관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생 갈렌 남쪽에는 해발 2502m의 샌티스(Santis) 산이 있다. 스위스 동북부의 알프슈타인(Alpstein) 산맥 중 가장 높은 산이다.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스위스를 포함해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6개국이 보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행의 향기] 구석구석 돌아본 스위스…싱그러운 연인을 만나다
생 갈렌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닿는 슈베그알프에서 센티스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바라본 주변 경관은 방문객의 넋을 잃게 한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 아래 펼쳐진 푸른 들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들과 펄럭이는 스위스 국기는 여기까지 온 시간을 아깝지 않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케이블카 바로 옆 슈베그알프 치즈공장에선 치즈 제조 과정을 볼 수 있다. 스위스 치즈의 역사는 약 2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알프스의 깨끗한 자연에서 풀을 먹여 건강하게 키운 소, 오랜 전통의 치즈 제조 기술이 결합해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현대적인 생산 시설을 갖춘 현장을 둘러보며 직접 맛을 보고 치즈를 살 수도 있다. 현지에선 숙성시간이 길수록 좋은 품질의 치즈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강한 맛과 향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시식 후 구매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옵사움의 산악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전통복장을 한 종업원
옵사움의 산악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전통복장을 한 종업원
케이블카를 타니 10분 만에 산 위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더워서 반소매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덜덜 떨릴 정도다. 준비한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입고 정상부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7~8분 정도 오르니 시야가 탁 트였다. 흰 구름을 수염처럼 매단 고봉들과 빙하가 보이고, 산 밑의 아기자기한 도시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경치를 이룬다.

전망대 내부의 레스토랑(Sntisgipfel)에선 커다란 유리창 너머 펼쳐진 멋진 풍광과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날씨에 따라 숨바꼭질을 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숨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먹는 음식은 더욱 특별한 기억을 선사한다.

동물과 교감하는 특별한 루체른 여행

루체른의 무제크 성벽과 알파카
루체른의 무제크 성벽과 알파카
취리히에서 약 50㎞ 남쪽으로 내려가면 스위스 중부의 아름다운 도시 루체른(Luzern)에 닿는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로 스위스를 가는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길 원하는 곳이다.

루체른 역에 도착해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루체른을 상징하는 역사유적 카펠(Kapell)교가 보인다. 14세기에 지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다. 로이스(Reuss) 강을 가로지르는 카펠교는 마치 요새처럼 보인다. 붉은 지붕으로 덮인 다리와 꽃으로 장식한 난간이 눈길을 끈다.

다리 안에 놓인 삼각형 목판에는 루체른의 역사, 수호 성인 등에 대한 그림이 112장 그려져 있다. 다리 한쪽에 높이 솟은 8각형 탑인 바서투름(물의 탑)은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종각과 망루, 감옥 등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루체른의 역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건축물은 13세기에 세워진 무제크 성벽(Museggmauer)이다. 지금은 도시가 확장돼 성벽 밖에도 많은 사람이 살지만 예전에는 성벽 안이 루체른의 전부였다.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현재는 870m 길이의 벽과 9개의 높다란 탑이 서 있다. 성벽 위를 걷고 탑에 올라 루체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1535년에 건설된 지트투름(시계탑)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시계다. 이 시계는 정시보다 1분 먼저 종을 울렸는데 도시 내 모든 시계의 표준이었기 때문이다.

루체른 성벽 외곽으로 가면 스위스의 전원풍경을 만날 수 있는 농장(hinter-musegg.ch)이 있다. 이곳은 무제크 성벽을 비롯한 지역의 여러 문화유산, 자연,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2000년에 설립됐다. 여러 야생동물을 접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 농장에는 작은 돼지, 양, 닭, 알파카, 소의 일종인 하이랜드 캐틀 등이 산다. 직접 먹이를 주고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어 흥미롭다. 내부의 레스토랑에서 유기농 식단을 즐길 수도 있다.

초원을 어슬렁대는 알파카에게 먹이통을 들고 다가가니 먹이만 날름 먹고는 도망가 버리기를 반복한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하이랜드 캐틀은 모르는 사람이 보이자 날이 선 눈빛으로 바라본다. 앙증맞은 작은 돼지들은 저희끼리 우당탕 달리고 부딪히며 넓은 풀밭과 농장을 오간다. 무제크 성벽에 간다면 전원의 동물도 함께 만나보자. 직접 만지고 교감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은 물론 힘찬 에너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환상적인 풍광이 펼쳐지는 산으로

루체른에서 기차를 타고 플뤼엘렌(Flelen)을 거쳐 버스로 약 37분을 가면 해발 1000m의 운터쉐헨(Unterschchen)이 나온다. 시틀리스알프(Sittlisalp)로 향하는 관문이다. 산책로 초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재소가 있다. 1850년에 문을 연 곳으로 업무시간에는 큰 기계톱이 나무를 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재소 주위에서 바라본 풍광은 가히 장관이다. 경쟁하듯 높이 치솟은 산과 그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스위스 전통가옥 샬레의 조화는 그야말로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길을 따라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1617m의 시틀리스알프로 올라갔다. 도착 후 스위스 국기가 펄럭이는 역을 나서면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된다. 걷다 보니 왜 스위스가 그토록 산악관광으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셔터만 누르면 작품 사진이 나올 듯한 모습 때문에 걸음이 더디다. 오가는 사람마다 넉넉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탁 트인 시야와 푸른 풀밭 위를 걸으니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35분 정도 걸으니 목적지인 옵사움에 이르렀다. 레스토랑(alpobsaum.ch)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스위스 전통복장을 한 아가씨가 식사를 가져다준다. 주인과 아가씨는 방문객을 위해 종종 악기를 연주하며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유려한 선으로 이어진 산세,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 식사하고 있자니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다. 스위스 산악풍경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해봐야 할 곳.

리기산 산책로 벤치에서 쉬고 있는 여행객.
리기산 산책로 벤치에서 쉬고 있는 여행객.
루체른에서 가볼 만한 또 다른 곳은 ‘산 중의 여왕’으로 불리는 리기(Rigi) 산이다. 최근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루체른에서 보트를 타고 비츠나우(Vitznau)로 이동해 산악열차를 타면 정상인 리기 쿨름(Rigi Klum)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은 1816년에 개업했고 올해 200주년을 맞았다. 이곳에서 산책로를 따라 리기 슈타펠(Rigi Staffel)까지는 약 20분 걸린다. 내려오면서 총 13개의 호수가 감싼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 산책로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산악열차와 어우러진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리기 슈타펠에는 지난 6월 개장한 레스토랑 베르그누스(BargGnuss)가 있으니 식사를 하거나 현지 맥주를 마시며 쉬어 보자.

리기 산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다면 리기칼트바트호텔(hotelrigikaltbad.ch)을 추천한다. 이 호텔의 가장 큰 차별점은 야외에서 스파를 즐기며 늘어선 고봉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거품이 부글대며 올라오는 따뜻한 물에서 즐기는 스파는 스위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루체른(스위스)=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여행 팁

스위스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면 ‘스위스 트래블 패스’ 구매는 필수다. 외국인에게만 파는 만능 승차권으로 기차, 버스, 유람선을 무제한 탈 수 있다. 480개 이상의 박물관에 공짜로 입장할 수 있고, 대부분의 산악열차도 50% 깎아준다. 리기 산을 오르는 산악열차는 무료다. 사용일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2등석 기준 3일권 패스는 210스위스프랑(약 22만8300원)부터. raileurop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