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점령한 북한 ‘自祝’

다시 6·25전쟁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북한군의 탱크가 서울에 들어온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나흘 만인 6월28일이었습니다. 무섭게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의 기세는 서울을 점령한 뒤 잠시 주춤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수도 서울을 자기네 생각만큼 쉽게 점령했으니 자축 분위기에 젖었겠지요. 또 북쪽으로부터 보급품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금세 끝내버릴 심산이었기에 보급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원 20만명이 들고 일어날 것을 기다렸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서울까지만 내려오면 남로당원과 빨치산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나 힘을 합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들은 누워서 떡 먹듯이 남한 전체를 점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원이나 빨치산이 들고일어나거나 후방에 있던 국군이나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는 1949년 이후 정부가 실시한 숙군 작업과 단속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힘을 모을 수 없었던 덕분이지요.

한강 전선에서 시간을 조금 끌 수 있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최후의 방어선을 마련했지요.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선택한 이유는 지형적 이점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동북부는 높은 산악 지대이고 서쪽은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지요. 덕분에 방어가 쉽고 전선이 짧아서 부분적으로 빼앗겼을 때 다시 찾기가 수월했습니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 치열

낙동강 전선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것은 다부동 전투였습니다. 그곳은 대구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아군에게나 적군에게나 중요한 지역이었지요. 당시 북한군은 8월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대구가 뚫리면 부산까지도 쉽게 밀고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북한군은 움직일 수 있는 부대의 절반을 낙동강 전선에 배치했습니다. 그곳에 거의 총력을 기울인 셈입니다.

국군과 유엔군도 낙동강 전선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아군을 따르는 피란민 행렬도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데 작용했지요. 그들을 적에게 넘겨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낙동강을 뚫지 못했습니다. 아군이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는 했지만 그 치열한 전투 중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전사자만도 아군이 2300여명, 북한군은 57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국 7만여명이 죽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청년들이었습니다. 정말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가슴 아픈 일이었지요.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습니다. 원래 인천은 상륙 작전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지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요. 상륙 부대 참모진의 장교였던 알리에 캡스 해군 중령은 “우리는 모든 자연적, 지리적 장애들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인천은 그것들을 모두 갖췄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인천은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크고 바다가 얕은 편입니다. 미국 해군의 상륙함은 7m, 전차를 실은 LST라는 배는 8.9m 정도로 바다가 깊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수심은 밀물이 최고 높이에 이르는 만조 때나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날은 한 달에 한 번 3~4일 동안만 있을 뿐이지요. 항구로 들어오는 뱃길도 좁고 물살도 거셌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9월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적군의 허리를 효과적으로 끊기 위해서였지요. 그날은 바다의 깊이가 9.6m에 이르는 만조 시기였습니다. 작전 개시 5일 전부터 연합군은 인천 지역에 맹렬하게 공중 폭격을 했습니다. 이틀 전부터는 배 위에서 월미도로 함포 사격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군인들이 월미도에 상륙했습니다. 북한군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한강을 건너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이 9월28일이었습니다.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세종로의 중앙청에 달려 있던 북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이승만 “서울 수복 넘어 北進 독려”

낙동강 전선에 모든 것을 걸었던 북한군은 인천의 기습으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북한군은 무너졌고 수많은 병사가 부대에서 탈출했습니다. 강제로 끌고 간 의용군이 많았기 때문에 이탈자도 많았습니다.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9월29일에는 서울을 되찾은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기념식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 없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은 38선 너머까지 쫓아가서 북한군을 무찌르고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6·25전쟁 전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국군의 힘만으로라도 38선을 넘어 계속 싸워야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군 통수권자로서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