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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소비와 물류의 중요성 인식한 ‘박 제 가’

입력 2016-08-19 16:50:36 | 수정 2016-08-19 16:50:36 | 지면정보 2016-08-22 S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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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경제학이 전래되기 전에 우리 자체적인 경제학적 토양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외국인으로부터 받는다면, 우리는 이 분 덕분에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은 다름 아니라 박제가다. 박제가는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일련의 요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제원리들이다. 박제가는 원래 서자 출신으로 흔히 말해 과거(문과)에 응시할 자격조차 없었다. 하지만 정조 시기가 되어 이러한 규제가 조금씩 풀리자 박제가는 규장각 검사관이라는 관직에 오르게 된다. 검사관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에서 도서를 관리하는 오늘날로 따지면 사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관직이었다.

청나라 화가 나빙이 1790년 8월 연행 사신으로 간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그림 옆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 두 수를 붙였다기사 이미지 보기

청나라 화가 나빙이 1790년 8월 연행 사신으로 간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그림 옆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 두 수를 붙였다

말단 관료였던 박제가를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내지 경제적 식견을 가진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의 저서 <북학의> 때문이다. <북학의>는 크게 내편과 외편으로 구분된다. 외편에서는 농업 관련 내용이 주로 기술되어 있으며, 내편에서는 오늘날의 물류, 건축, 외국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박제가가 이러한 북학의를 저술하게 된 궁극적인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부강한 청나라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이 가난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북학의>를 통해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원인 중 하나를 검소함에서 찾았다. 당시 사회는 유교를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검소함을 미덕의 하나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윤을 남기는 것은 천한 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흔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이문(이익을 남기는 돈)을 남기는 상인들의 신분을 가장 천한 계층으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을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지향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검소함이 국가가 가난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은 박제가의 주장은 실로 파격 그 자체였다.

박제가는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북학의를 통해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박제가의 주장은 전설적인 경제학자 케인스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경제학자 중에서 소비를 주목하기 시작한 사람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였다. 우리는 흔히 케인스 이전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생산만 되면 소비는 저절로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를 경제학에선 ‘세이의 법칙’이라 한다. 세이의 법칙은 무언가 물건을 하나 생산하려면 물건을 만들 사람도 고용해야 하고, 물건에 투여될 원료도 구매해야 하고, 임대료도 지불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소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득을 바탕으로 소비가 저절로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생산만 잘 되면 소비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고전학파 세이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대공황이 1929년 발생한다. 사실 대공황 이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진 시기였다. 그 단적인 예로 헨리 포드가 설립한 포드 자동차를 들 수 있다. 포드는 40세 되던 해인 1903년 포드자동차회사(Ford Motor Company)를 설립한다. 포드자동차회사는 이전까지 자동차 생산의 평균 작업 주기가 514분 걸리던 것을 단 2.3분 만에 완료하는 혁신을 달성하였다. 그야말로 생산성의 혁신이었다.

이 밖에도 록펠러, 카네기 등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인 부호의 등장이 바로 대공황 이전에 주를 이루었다. 당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이처럼 생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와 고용 활동이 부재한 극도의 불황이 유발되는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때 케인스는 소비에 주목한다. 그는 장기적인 시점에는 생산이 중요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소비를 중요시해야 하고, 소비가 있어야만 누군가가 그에 부응하기 위해 생산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소득이 생겨 경제가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케인스의 관점처럼 박제가 역시 <북학의>에서 재화를 우물에 비유해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샘솟듯 재화 또한 소비가 있어야만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우물물도 계속 사용하면 새로운 물이 솟아오르듯이 경제에서 생산된 재화는 소비를 통해서 재생산이 가능하고, 재생산은 다시 소비를 유도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박제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목한 또 다른 부분 중 하나는 물류 부분이다. 그가 물류를 주목하게 된 것은 청나라를 네 차례 방문하면서 조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마차’를 보고 떠올린 통찰력이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은 도보였다.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소보다 많이 먹는 말은 유지비용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양반들이 말을 타고 다니었다. 하지만 양반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더라도 옆에 반드시 노비를 데리고 간다. 이 때문에 당연히 말의 이동속도는 옆에서 걸어가는 노비의 속도에 맞춰지게 된다. 즉 이동속도가 굉장히 느리다. 당시 상거래를 수행했던 보부상들 역시 봇짐 지고 와서 파는 규모의 거래만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상거래 속도와 규모를 고려할 때 결코 당시 조선에서는 상공업이 활발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달랐다. 청나라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마차는 상인들이 마차에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 와 장사해서 커다란 상거래 활동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보부상이 봇짐에 생선 몇 마리를 지고 와서 거래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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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에서 마차 활용이 저조했던 이유는 조선의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다. 마차를 원활히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도로가 구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이다. 도성인 한양이 평지였기 때문에 도읍으로 정한 거지만, 한양 시내로 들어오려면 미아리 고개니, 무악재와 같은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러한 고갯길의 예전 사진을 보면 도로가 매우 좁아 말 한 필에 뒤에 같이 가는 노비들이 한 줄로 쫓아올 정도로 좁아지는 구간도 많았다. 다시 말해 마차가 이동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경제활동이 원활히 수행되기 위해서는 소비활동과 이러한 소비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물류시스템은 중요한 요인이다. 260여년 전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 본 우리 선조 박제가는 경제학자로 칭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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