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현 사바에시가 2008년 일본 전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지역활성화 아이디어 콘테스트 ‘시장(市長)이 돼보지 않겠습니까?’에서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시장’으로 뽑힌 학생들. 이들은 사바에에서 합숙하며 다양한 도시 활성화 정책 아이디어를 내놨다. 황소자리 제공
후쿠이현 사바에시가 2008년 일본 전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지역활성화 아이디어 콘테스트 ‘시장(市長)이 돼보지 않겠습니까?’에서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시장’으로 뽑힌 학생들. 이들은 사바에에서 합숙하며 다양한 도시 활성화 정책 아이디어를 내놨다. 황소자리 제공
일본 교토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된 야마모토 노리코는 2000년 1월 남편의 본가가 있는 혼슈 중서부 후쿠이현 사바에시로 이사했다. 그해 5월, 넷째 아이를 출산한 뒤 야마모토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어머니는 일하지 않으니까 어린이회 임원을 맡아주세요.” 그가 전업주부란 사실을 안 주변 사람들의 시각은 이런 식이었다. 맞벌이가 보편화된 이 지역에선 신생아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하러 가는 게 상식으로 통했다.

[책마을] 후쿠이현은 어떻게 일본 최고 행복도시가 됐나
2002년 의료현장에 복귀한 그는 병원에서 환부를 고정하는 외과용 테이프가 자주 바닥에 떨어져 먼지가 묻는 것을 보고 “누군가 이 테이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주변 화장품가게 주인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사바에 상공회의소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테이프를 보호하는 장치를 개발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임원은 화장품가게 주인의 남편이었다.

야마모토는 3D 조형 설계를 하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의료용 외과테이프 커터 ‘기루루’를 고안했다. 상공회의소 인큐베이터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사업계획을 구체화하고, 관련 기관과 직장 동료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의료제품 생산업체 미디디어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이 제품과 후속작인 목제 링거 스탠드인 ‘필’을 히트시키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중소기업으로 떠올랐다. 그는 “이곳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인생을 살게 됐다”며 “지역 전체가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후쿠이는 창업자에게 천국 같은 곳”이라고 했다.

기자 출신 논픽션 작가인 후지요시 마사하루가 쓴 《이토록 멋진 마을》에 소개된 야마모토의 창업기다. 이 책은 최근 일본에서 저출산·초고령화 시대의 지속 가능한 공동체 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후쿠이현에 대한 심층 리포트다.

가구당 월평균 실수입 1위, 평균 월급 1위, 초·중학교 학력평가 1위, 대졸 취업률 1위. 동해와 맞닿은 인구 79만명의 후쿠이현은 일본에서 변방에 속하지만 여러 지표에서 도쿄 등 대도시를 압도한다. 노인과 아동의 빈곤율, 실업률은 가장 낮다. 노동·기업, 안전·안심, 의료·건강 등의 40개 지표로 평가하는 행복도 조사에서 1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비결이 뭘까. 저자는 2년여에 걸친 현지 취재를 통해 교육과 문화, 경제가 유기적인 그물망을 구축하는 ‘후쿠이 모델’을 제시한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빨리 중국에 당한 곳입니다.” 저자가 세계 3대 안경 생산지인 사바에시를 처음 찾았을 때 한 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중국이 세계의 하청공장으로 대두하면서 사바에 시내 안경업체 수는 40% 이상 급감했고 매출은 반 토막 났다. 안경과 함께 후쿠이현 제조업의 주축인 섬유, 칠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끊임없는 소재혁명을 통해 ‘사양산업판 실리콘밸리’를 세웠다.

이런 기술혁신의 밑바탕에는 후쿠이대와 후쿠이공업전문학교가 업체들과 손잡고 추진하는 공동개발이 있다. 수십년간 한우물을 파온 장인들과 첨단기술에 능한 젊은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사업모델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낸 것이다. 후쿠이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이 14개, 일본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이 51개나 있다. 모두 중소기업 제품이다. 후쿠이현은 인구 10만명당 사장 수(1599명)도 가장 많다. 중소기업이 많고 창업이 활발하다는 얘기다.

이 지역이 약진하는 배경에는 후쿠이만의 독특한 교육시스템이 있다. 오래전부터 후쿠이는 ‘10년 앞을 내다본 수업’을 교육의 기초로 삼아 학습지도 요령을 독자적으로 구축해왔다. 지식을 습득하는 대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고과정을 가시화해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스스로 글로 써내는 수업을 정착시켰다. 한마디로 급변하는 세상에 맞춰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을 키워주는 ‘자발교육’을 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성에서 기인한 ‘부지런한 문화’도 중요한 성공 요인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빈곤과 실패의 역사를 간직한 데다 산으로 둘러싸여 믿을 것은 사람밖에 없었던 마을에서 후쿠이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지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후쿠이 사람들은 부지런하다. 평생 현역으로 일하고 여성이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마을 전체가 나서 육아를 공동으로 하고, 일상 자체가 학교 역할을 했다. 끈끈한 향토애로 뭉쳐 있지만, 외지인이 쉽사리 스며들기 쉬운 관용의 풍토가 널리 퍼져 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힘겨웠던 경험이야말로 미래를 만드는 중요한 동력임을 후쿠이 지역을 취재하면서 깨달았다”며 “한국인들이 지금부터 다가올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어떻게 이겨낼지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