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또 도진 '식언정치'
“여야 간 신뢰도가 ‘0’(제로)인데 합의문이 지켜지겠습니까.”

‘조선·해운 구조조정 청문회’ 증인 채택 협상이 난항에 빠지면서 추가경정예산안 심사가 중단되자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18일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여야가 지난 12일 합의한 ‘22일 추경안 처리’ 약속이 또다시 식언(食言)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부터 밤낮없이 심사하더라도 여야의 합의는 물리적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19대 국회 때도 이런 행태를 자주 봤다. ‘합의 처리’냐, ‘처리 합의’냐 등 문구를 놓고 말싸움만 하다 합의문을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합의문을 밥 먹듯이 파기하는 19대의 구태가 20대 국회에서도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이번 청문회의 본질은 조선·해운산업 부실화 원인과 책임 규명이다. 그런데 ‘서별관 회의’ 참석 멤버로 대우조선해양에 자금 지원을 결정할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최경환 의원,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의 증인 채택 여부가 쟁점이 되면서 정쟁으로 변질됐다.

야당은 세 사람의 출석 없이는 진실 규명이 어렵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당을 향해 추경안을 처리한 뒤 ‘맹탕 청문회’를 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여당은 야당이 현 정권 실세를 불러 망신을 주려는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며 버티고 있다. 여나 야나 정치적 이득만 챙기려는 의도로 보인다.

여야 간 입장차가 팽팽해 꼬인 실타래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회 내 수적 우위로 공세를 펴는 두 야당에 맞서 여당은 무기력한 모습이다. 청문회를 진행해야 할 국회 정무위의 여당 소속 위원장과 간사는 해외 출장 중이다.

조속한 추경안 처리를 바라는 정부와 경영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는 국회의 모습에 한숨만 짓고 있다. 총선 직후 너도나도 ‘협치’를 하겠다던 여야의 약속은 온데간데 없다. 여야의 갈등이 이견을 좁히는 과정이라면 다행이지만, 최소한 합의문까지 작성한 약속만큼은 지키는 게 도리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에 목마른 국민은 답답할 뿐이다.

김채연 정치부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