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하멜의 눈에 비친 조선
하멜(1630~1692)의 일생은 드라마다. 배를 타고 동서양을 넘나든 개인사도 기구했지만, 그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부침 또한 심했다. 네덜란드 서부 해안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21세에 동인도회사 선원이 됐다. 영국과 프랑스·네덜란드 등이 동인도를 중심으로 해상무역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국제교역에 한창이었다.

하멜이 풍랑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날은 1653년 8월16일. 363년 전 오늘이다. 난파 과정에서 28명이 익사하고 38명만 살아남았다. 제주 목사가 출신국과 행선지 등을 물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낭가삭기(나가사키)”를 반복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두 달 뒤 통역자가 도착했다. 26년 전 똑같은 운명을 겪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였다. 하지만 그와도 말이 안 통했다. 귀화 후 조선에 정착한 그가 오랜 세월 모국어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눈물바람으로 서로 붙들고 한 달 가까이 이국 설움을 나눈 끝에 겨우 통역이 이뤄졌으나 조선은 “송환 불가”를 결정했다.

한양으로 이송된 뒤에도 송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청나라 내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이 하멜 일행의 신무기 제조기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이들의 임무는 왕의 행차에 동원되는 ‘용병’ 역할뿐이었다. 그러다 청나라 사신들에게 “구해달라”고 간청한 사건이 터지고, 서양인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던 조정은 이들을 전남 강진으로 유배했다.

현종 즉위 후 3년간의 극심한 흉년을 겪으면서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고, 나중엔 16명밖에 남지 않았다. 굶주림과 고된 노역 때문에 하나씩 죽어갔다.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탈출해 나가사키로 향했다. 13년 만의 탈출이었다. 이후 일본의 교섭으로 나머지도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이 그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제출한 보고서가 곧 《하멜 표류기》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 책에서 그는 조선인의 민족성을 이렇게 기술했다.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남을 속여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억류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겠지만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단면이어서 씁쓸하다.

그의 보고서를 검토한 동인도회사가 조선과 직교역을 추진하며 ‘코레아호’라는 대형 상선까지 준비했으나 예송논쟁으로 정신이 없던 조선은 손사래를 쳤다. 17세기 유럽과 조선의 만남은 그렇게 좌절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