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생산량을 늘려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산유국 간 ‘치킨게임’이 여전히 뜨겁다. 국제 원유 가격이 떨어지는데도 산유량은 오히려 더 증가했다. 치킨게임은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있다.

◆냉방용 석유수요가 늘었다는데

10일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달 하루 1067만3000배럴의 원유를 생산했다. 전달보다 12만3000배럴을 더 생산해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6월(1056만배럴) 수준을 넘어섰다.

산유량이 증가한 표면적 이유로는 날씨가 꼽혔다. 낮 기온이 최고 50도를 넘어서면서 에어컨 사용량이 크게 늘어 발전용 석유가 많이 필요했다고 사우디는 밝혔다. 시장과 전문가들은 사우디의 이 같은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는 라이벌 산유국과 경쟁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왔다”며 “지난주에는 아시아 거래처에 가격까지 낮춰주면서 시장점유율 확대에 공을 들였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끝까지 간다"…미국·이란 보란듯 사상최대 원유 생산
주요 산유국이 유가 반등을 유도하기 위해 사우디에 감산을 요구했을 때도 확답을 주지 않았다. 지난 2월 국제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밑으로 떨어지자 이라크 카타르 베네수엘라 석유장관들이 사우디에 애원하다시피 매달렸지만 사우디는 이란 핑계를 댔다.

미국 등 서방국의 경제제재에서 풀린 이란이 하루 100만배럴 증산을 발표하자 사우디는 이를 문제 삼았다. 사우디는 이슬람 수니파의 맏형으로서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의 증산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지난 2월부터 단 한 번도 산유량을 줄이지 않았다.

사우디의 비협조로 감산 논의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제 유가가 하락하는데도 산유량은 계속 늘었다. OPEC 회원국의 지난달 산유량은 3311만배럴로 전달보다 4만6000배럴 증가해 사상 최대 수준에 달했다. 이란은 지난해 315만배럴이던 하루 생산량을 지난달 362만배럴로 올렸다.

◆미국 셰일오일업계도 의식

사우디가 감산에 나서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다. 미국 셰일오일업계는 한때 100달러 이상이던 셰일오일 생산원가를 60달러 이하까지 떨어뜨렸다. 현재 40달러대인 유가가 다시 오르면 사우디는 언제든지 미국의 셰일오일업계와 맞서야 한다. 수년간 사우디는 손해를 보더라도 시장점유율을 유지한다는 전략으로 치킨게임을 벌여 미국 셰일오일업계에 ‘1패’를 안겼다.

치킨게임의 결과는 가혹했다. 산유국 경제가 풍전등화에 빠졌다. 사우디도 지난해 재정적자가 980억달러로 사상 최대에 달했다. 재정난으로 교통범칙금까지 올리겠다고 나섰다. 해외 투자자에게는 사우디 증권시장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유가 하락 여파로 경제난이 심해지자 OPEC 회원국은 다음달 다시 산유량 동결을 논의할 예정이다. 동결 가능성은 높은 편이지만 효과는 의문시된다는 분석이다. 마이클 위트너 소시에테제네랄 수석석유시장분석가는 “동결 결정을 하더라도 심리적인 효과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대부분의 산유국이 생산 능력을 총동원해 원유를 뽑아내고 있어 감산이 아니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다.

국제 유가는 추가 하락세다. 미국의 원유 비축량이 3주 연속 증가했다는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발표까지 겹치면서 서부텍사스원유(WTI)는 11일 장중 배럴당 41.22달러로 전날보다 1.17% 밀렸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