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입법 바벨탑' 쌓아올리는 대한민국 국회
유럽연합(EU)에서 탈퇴를 결정한 영국과 유럽 대륙국가들이 뚜렷하게 다른 것 가운데 하나가 법(法)제도다. 영국은 불문법(不文法·문장의 형식을 취하지 않은 법률), 대륙국가들은 성문법(成文法·문서로 제정된 법률)으로 나라를 운영한다.

불문법·성문법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행하기에 이른 배경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하게 해준 에피소드를 얼마 전에 전해 들었다. 초등학생 자녀를 각각 둔 두 회사원이 런던(영국)과 파리(프랑스) 지사에 발령받아 아이들을 현지 학교에 전학시키게 됐다. 아빠와 함께 찾아 온 아이를 만난 런던의 초등학교 교장은 “몇 살이냐”고 묻고는 곧바로 해당 학년의 학급으로 배치했다. 전학 수속에 필요한 서류는 ‘준비되는 대로’ 제출하라고 했다. ‘사람 먼저, 수속은 나중에’였다.

파리의 학교는 달랐다. 한국에서의 재학증명서 등 몇 가지 서류가 먼저 필요했다. 급히 부임하느라고 챙기지 못한 서류가 한국에서 도착할 때까지 아이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구체화되고 명문화된 법률은 사람들을 필요 이상으로 제약할 소지가 크다. 게다가 어떤 법률이건 제정되는 순간부터 구닥다리(out-dated)가 돼 상황에 맞춘 사회적 대응을 어렵게 한다.” 영국이 불문법 전통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다. 이런 영국이 ‘통합 공고화(鞏固化)’를 명분 삼아 온갖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 온 EU체제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불문법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과 함께 영국이 전 세계의 금융시장과 정보기술(IT) 분야 신산업 시장을 쓸어 담고 있는 까닭이 선명해진다. 사람과 기업을 시시콜콜 속박하지 않는, 보편성과 추상(抽象)성이 불문법의 특징이다. 첨단기술 등장과 그에 맞춘 시장에서의 새로운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명확성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성문법 체계의 국가들에 가장 큰 과제는 경직성 탈피다. ‘모든 법령은 최대한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만든다’는 입법 원칙이 강조되는 이유다. 미주알고주알 법을 만들면 미래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비가 어려워지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과 탄력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법이 아닌 행정부의 시행령 영역에 속하는 규정까지도 법으로 제정하는 ‘대못박기’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퇴근 후 업무 관련 카톡 금지, 극장에서의 영화 예고편 상영 제한 같은 ‘황당 규제법안’들이 쏟아진다. 20대 국회가 출범한 지 두 달여 만에 벌써 1000개가 넘는 법안을 내놓는 ‘입법 폭주국가’가 됐다. 국회의원들이 내놓는 법안은 ‘규제영향 평가’ 같은 객관적 검증도 받지 않는다. 다수가 결정하면 무엇이든지 법이 되는, 무소불위 입법만능주의에 포획돼 버렸다.

며칠 전에는 ‘(지방으로 이전한) 공기업은 본사의 지역주민 복리 증진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법안까지 발의됐다. 공기업들이 벌어들인 수익을 지역 기관들의 쌈짓돈으로 쓰겠다는 ‘생떼’를 버젓이 법안으로 내놓은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법 의식이 어느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진나라 때 정치인 상앙은 젊은 시절 엄격한 법령 제정과 적용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세한 법치로 나라가 분열되자 책임을 지게 됐고, 도망 치다가 붙잡혀 목숨을 잃고 만다. 몸을 숨기기 위해 찾은 객사의 주인이 “법령에 의해 여행증이 없는 손님을 재우면 연좌제로 처벌받는다”며 거부하는 바람에 숨을 곳이 없게 된 탓이었다. “내가 만든 법의 폐단이 내 몸에까지 미치는구나!” 상앙이 탄식하며 했다는 얘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다가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진노한 신(神)으로부터 바벨탑 붕괴라는 형벌을 받았다는 일화도 떠오른다. 무소불위로 쌓아 올리고 있는 한국 국회의원들의 ‘입법 만능주의 바벨탑’이 어떤 결말을 부를지 두렵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