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한경 주필 브렉시트 영국을 가다] "영국은 침몰하는 EU에서 탈출했을 뿐"
하필 라마단이 끝나는 날이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30분을 기다렸다. 결국 지하철로 발길을 돌렸다. 골목길에서 얼핏 들여다보이는 건물에서 막 집회를 끝낸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일을 쉬면 도시 인프라가 멈춘다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영국 런던은 외국인들의 도시였다. 놀랍게도 전체 시민의 63%가 이방인이었다.

브렉시트 논쟁이 한창이던 3개월 전 런던시장에 당선된 사디크 칸(45)은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이 브렉시트의 배경이라는 일각의 해설은 간단하게 무너졌다. 가장 국제화된 영국에서 외국인혐오증이라니! 영국의 개방성은 유럽연합(EU)의 어떤 국가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런던은 활력이 넘치는 세계 도시였다. 피카딜리광장에서 뻗어 나간 도로는 젊은이들로 인산인해였다. 도처에 공사장이었다. 형광색 안전복을 입은 작업부 대부분은 동시에 자신의 런던 생활도 쌓아올리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이었다. 아직 우버는 겉돌고 있고(운전자들이 길 찾는 데 서툴렀다), 구글 맵이 맹위를 떨치며(길을 물으면 누구라도 스마트폰부터 꺼내들었다), 스토리들이 쏟아지고(위키드는 지금도 매회 매진이다), 윔블던은 세리나 윌리엄스를 스타로 만들어 올리며, 세계 청년들을 열광케 하는 프리미어리그가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지난 10년간 550만명의 외국 젊은이가 새로운 삶을 찾아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러고도 영국 실업률은 5.1%의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30년 만의 런던행이었다. 런던은 더 커지고, 더 위대해지고, 더 놀라운 도시가 돼 있었다. 한국 언론의 게으름이 부끄럽게 다가왔다. 30년 전에는 마거릿 대처의 빅뱅이 단행됐고 지금은 역사적 브렉시트 논쟁이 불붙고 있는 것이 달랐다. 혁신의 영국인이 정체된 EU의 한 변방 도시에 만족할 리 없다. 브렉시트를 선택한 이유가 금세 느껴졌다. EU라는, 너무 몸에 꽉 끼어 맞지 않는 국가주의적 규제의 틀을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었다. 영국이 무너지는가, EU가 무너지는가 하는 질문은 이미 던져졌다. 에이먼 버틀러 애덤스미스연구소장은 ‘EU가 침몰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큰 국가, 규제, 반(反)시장으로부터의 탈출’로 브렉시트를 정의했다.

그러나 지난 1주일은 참담했다. 파운드화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부동산시장은 폭락 공포에 떨고 있다. ‘영국 때리기’라고 할 만한 악재들만 쌓이고 있다. 자초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희망적 뉴스도 있다. 미국 자본이 런던 부동산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든가, 런던 금융은 끄떡없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경계란 무엇인가, 번영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묻는 미증유의 역사적 실험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족:한편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은 비지땀을 흘리며 인수할 만한 영국 회사를 찾아 그 시각 런던 외곽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