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상인·군인·관료 권력 투쟁이 역사를 바꿨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2008년 파산했다. 세계를 덮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서막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금융자본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자유주의적 역사관’, 즉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도래함으로써 역사가 마지막 발전 단계에 다다랐다”는 명제가 설득력을 잃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세계는 카를 마르크스의 ‘계급주의적 역사관’으로 회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시장이 없는 새로운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는 시각도 믿음이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영국 옥스퍼드대 사학과 교수는 왜 상인이 지배하는가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이나 자유주의적 사관은 현재 세계가 처한 난관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안적 사관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귀족, 사제, 상인, 노동자를 묘사한 1420년 삽화(왼쪽)와 기도하는 자, 전쟁하는 자, 허드렛일을 하는 자를 묘사한 13세기 삽화. 원더박스 제공
귀족, 사제, 상인, 노동자를 묘사한 1420년 삽화(왼쪽)와 기도하는 자, 전쟁하는 자, 허드렛일을 하는 자를 묘사한 13세기 삽화. 원더박스 제공
저자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 대한 시각부터 후쿠야마나 마르크스와 다르다. 후쿠야마는 상이한 이데올로기 간 갈등, 마르크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계급 간 갈등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봤다. 저자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직업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직업적 요인은 ‘특정 종류의 직업군이 가지는 이해관계 및 가치의 총화’다. 서로 다른 직업군이 자신의 이해관계 및 가치를 바탕으로 다른 직업군과 경쟁하고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역사가 변화해 왔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직업군을 ‘카스트’로 부른다. 그는 현인(학자, 제사장, 기술관료 등), 군인, 상인 등 세 집단을 역사를 지배해 온 주요 카스트로 본다. 기원전 2000년께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짚어가며 이들 카스트 간 세력 변화가 역사적인 변혁의 단초가 됐음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께 처음으로 카스트에 기반한 농경국가가 등장했다. 농경국가에서 도시문화에 밝은 현인은 군인과 손잡고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상인은 이들의 지배를 받는 존재였다. 이런 체제는 이후 4000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된다. 19세기 중공업 기반 경제체제가 등장하며 이 체제가 깨진다. 중공업은 현인과 상인이 손잡고 이룩한 것이었다. 자연히 상인의 세력이 커졌다. 이후 상인 세력은 두 번의 부침을 겪는다. 하나는 군인이 독주하며 일으킨 세계대전, 다른 하나는 상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 경제 대공황이다.

세계가 전쟁과 대공황에 시달리는 동안 북유럽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출현했다. 이 사회에서 체제의 전반적인 관리감독은 기술관료, 즉 현인이 맡았다. 이 모델이 2차 대전 이후 세계를 장악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또 달라졌다. 현인이 힘을 잃게 만드는 몇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현인이 냉전이라는 버팀목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군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게 첫 번째다. 현인이 노동자와 힘을 합쳐 만든 사회주의 국가가 실패한 게 두 번째다. 적수가 없어진 상인은 1970년대 들어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며 다시 힘을 갖기 시작한다.

저자는 최근 들어 “권력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상인 체제가 경기 침체, 부채, 국제무역 및 금융 불균형 등으로 점점 지지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앞으로 어떤 카스트가 왕좌에 오를지 예견하지는 않는다.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결말을 열어놨다.

저자의 역사 서술은 정밀화라기보다 토르소에 가까워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사료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보다 잔가지를 과감하게 생략하며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준다. 저자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군인과 상인, 현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재해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