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만물은 스토리로 이뤄져 있다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각몽…. 소설가 박상우 씨(58)가 최근 새 장편소설 《비밀 문장》(문학과지성사)을 펴내며 이 작품의 ‘이론적 근거’라고 밝힌 것들이다. 소설에 무슨 이론이 필요할까. 이번 작품이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과학적인 틀과 내용으로 세상과 삶의 본질을 이야기해서다. 책 끝에 수학, 천문학, 물리학, 불교학 등 35권에 이르는 다양한 참고문헌이 소개돼 있다. 2005년 소설의 영감을 처음 받았다는 이 작품의 완성에 왜 12년의 세월이 걸렸는지 짐작할 만하다.

박씨는 “양자역학, 평행우주, 자각몽 등이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 세 가지를 병행함으로써 본격소설의 운동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물질우주에서 ‘변화’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인데 이 작품에선 우주 만물의 물질적 변화를 이야기의 전개 과정으로 봤다”며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적 단위도 모두 스토리 구성 요소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우주를 ‘스토리코스모스’로 명명했다”고 말했다.

소설가 지망생인 29세 문필우가 자살을 결심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그는 서른이 될 때까지 등단하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터였다. 문필우는 지인 소설가가 에베레스트로 떠나며 내버려두고 간 달동네 정상의 집에서 삶을 마감하기로 마음먹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10대 후반 단발머리 소녀의 형상을 한 영체(靈體:신령스러운 몸) 쿄쿄와 만난다. 쿄쿄는 문필우에게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알려준다. “물질로 이뤄진 모든 것들은 실재가 아니에요. 영체가 실재이고 육체는 영체가 물질우주로 들어갈 때 착용하는 환영의 의복 같은 것”이라는 식이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세계관은 “우주 만물은 스토리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문필우는 인간이 세상을 스토리로 자각하는 것을 돕기 위해 ‘스토리코스모스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한다. 그 뒤 문필우는 과거의 연인 써니와 다시 만나 인연을 맺지만 해피엔딩으로 책이 끝나지 않는다. 결말은 열려 있다.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언젠가 자살의 근거가 된다”로 시작한 소설은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언젠가 초월의 근거가 된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자살’이 ‘초월’로 변한 것. 박씨는 “이번 소설을 포함해 ‘외계 3부작’을 쓸 계획인데 ‘외계인’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작품의 초고를 이미 한 웹진에 연재했다”며 “새 소설을 발표한 게 8년 만인데 그동안 못 쓴 만큼 앞으로는 에너지를 많이 쏟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