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빠진 50년 외길…"무대는 숨과 같더군요"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늙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는 존재감, 어려운 형편에도 한눈팔지 않는 인내심, 주·조연을 아우르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성실함 등이 아닐까.

연극에 빠진 50년 외길…"무대는 숨과 같더군요"
이런 조건을 갖춘 노(老)배우가 오는 8일 무대에서 칠순을 맞는다. 1969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해 48년간 ‘무대밥’을 먹은 배우 김재건 씨(69·사진)다. 서울 동교동 CY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밥’(김나영 작, 문삼화 연출)에서 치매에 걸린 노사제 역으로 열연 중인 그를 공연장에서 만났다.

“2010년 국립극단을 퇴직한 뒤에도 매년 꾸준히 네 편씩은 작품을 하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이 대학로 연극 다 해 먹는다’고 농담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네요. 하하.”

최근 1년 동안에도 연극 ‘뽕짝’ ‘지상 최후의 농담’ ‘핑키와 그랑죠’에 이어 ‘밥’까지 네 편의 연극을 통해 거의 쉬지 않고 무대에 서고 있다. 상업적인 색채가 짙은 극부터 젊은 창작자의 실험극까지 아우른다.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배역도 가리지 않는다. 연극평론가 구희서 씨는 김씨에 대해 “바람막이가 없는 무소속 배우로는 참 보기 드문 꾸준함”이라며 “역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의 중요성을 끄집어내 안정된 모습, 매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고 평했다.

22세에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해 ‘무대 인생’ 외길을 걸어온 지 근 50년. 흔들린 순간은 없었을까. “국립극단 단원 시절 한 방송사에서 월급의 10배를 줄 테니 오라고 하더군요. 오후 6시 ‘칼퇴근’이라고 하길래 ‘퇴근하고 대학로 무대에 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락하러 갔어요. 그런데 공연 출연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길로 방송사에서 나왔죠. 국립극단을 떠날 수는 있지만 무대를 떠날 수는 없었거든요.”

그의 삶은 자연스레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아노 연주자인 아내가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한 번도 지나간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관객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무대가 나에게는 ‘숨’과도 같다”고 했다. 좋은 작품도 많이 만났다. 1992년 ‘사로잡힌 영혼’의 일점도사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다. 1993년 천축 역을 맡았던 국립극단의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칠순 기념공연이 된 연극 ‘밥’은 치매에 걸린 노사제와 30년 동안 그 사제의 밥을 해온 식복사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을 그린다. 평생을 외로이 신앙의 길을 걸어온 노사제와 자신의 살점을 떼어 입에 넣어주는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을 절절하게 그린다.

“좋은 연극으로 칠순을 맞게 돼 기쁩니다. 국립극단에서 명예퇴직한 뒤 대학로에 나온 지 6년 정도 됐으니 아직 ‘대학로 신인배우’인 셈이지요. 치매에 걸려 말을 못하거나, 대사를 외우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 계속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