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엘리 위젤과 '나이트'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다. 바이올린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율리에크의 영혼이 바이올린 활이 된 것 같았다. 이루지 못한 그의 희망이,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과거가. 사라져버린 그의 미래가.”

어제 타계한 유대계 미국 작가 엘리 위젤(1928~2016)이 1954년에 쓴 회고록 《나이트(night)》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기록한 가장 중요한 저작물의 하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애독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위젤은 이 책을 비롯한 50여권의 저작과 국제적인 활동 등을 통해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고 이 활동을 인정받아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위젤은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15세 때 부모와 누나, 여동생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고통과 공포 앞에서 신앙도 부모도 가족도 다 잃고, 분노도 복수심도 모두 버리고, 결국 먹을 것에만 매달리는 인간의 밑바닥을 경험했다. 그는 수용소에 끌려간 첫날 밤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77쪽)에 압도 당하고 절망했다.

수용자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어린 소년들을 공개처형하는 장면을 보면서, 빵을 더 먹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을 보았을 때 위젤은 신을 향한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깊은 밤에 울려퍼진 바이올린 소리는 유대인들에겐 연주가 금지된 베토벤의 곡이었다. 연주하던 소년은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주검으로 변했다.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언론인으로 일했다. 1960년대부터는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적극적인 개입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중립은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침묵은 결과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는 국경을 초월해 나서야 한다.”(노벨평화상 수락연설)

미국 대통령에게 특히 직언을 많이 했다. 보스니아 사태 때는 클린턴을, 시리아 사태 때는 오바마를 질타했다. 《나이트》는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문학적 표현이 별로 없는 회고록이다. 생전의 위젤은 “진실에 허구를 섞으면 진실의 힘이 약화된다”며 홀로코스트 영화화에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트》는 또 그 제목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본격적으로 탄압한 도화선이 됐던 1939년 11월9일 ‘크리스털 나이트(crystal night:수정의 밤)’를 연상시킨다. 이날 유대인 가게 수만 곳이 약탈당했는데 깨진 유리가 수정처럼 밤새 반짝였다고 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