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게 대통령에게도 직언한 최형섭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초대 소장을 맡은 고(故) 최형섭 박사(1920~2004·사진)는 1968년 미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 과학자들과 점심을 먹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KIST에는 당신들과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 연구를 하지는 못합니다. 정부나 산업계에 도움이 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최 박사는 1966년 KIST가 설립된 뒤 수시로 미국과 유럽을 찾았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젊은 과학 기술자를 데려오기 위해서다. 가난한 나라를 먹여 살리기 위해선 기술 확보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인재 유치가 급선무였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사람을 데려오기 쉽지 않았는데도 최 박사는 유치 대상인 젊은 과학자를 만날 때면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같은 배경은 그가 KIST 초대 소장을 맡으며 세운 운영 철학 때문이었다. 반드시 산업에 사용될 응용연구를 하는 종합연구소가 될 것, 고급 연구원을 전원 해외에서 영입하고 기업과 계약연구를 중심으로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자율성을 보장하고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는 최 박사 말에 젊은 과학자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해 말 18명으로 구성된 첫 유치 과학자를 시작으로 KIST에서 일하기 위해 돌아오는 과학자가 해마다 늘었다.

최 박사는 산업 관련 응용분야로 연구에 제한을 뒀지만 과학자의 처우와 자율성 보장에는 각별히 신경 썼다. 그래야 좋은 연구가 나온다고 믿었다. KIST 연구원 월급은 서울대 공대 교수의 월급보다 세 배가량 많았다.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좋은 과학자를 부르고 싶거든 정부는 회계감사 등 어떤 간섭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행정이 연구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요청은 1980년대 신군부가 들어설 때까지 지켜졌다.

최 박사는 국내에선 보기 드문 과학 행정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43세에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을 맡았고, KIST 소장을 거친 뒤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과학 기술 관계 법령을 정비했다. 한국 과학의 먼 미래를 위해 미국과 유럽의 연구 도시를 모델로 대전 일대에 대덕연구특구 건설 계획을 마련하고 고급 인재 육성기관인 KAIST 설립 계획도 세웠다.

최 박사는 평소 “기술이 뒤따라 연출되지 않는 과학은 불모(不毛)이고 과학이 없는 기술은 시든다”는 과학사학자 데릭 솔라 프라이스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원로 과학자들은 지금도 최 박사가 KIST 소장과 과기처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를 한국 과학의 황금기라고 평가한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