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이게 혁명이라면
여기저기서 4차 산업혁명을 떠든다. 국회, 정부가 더 극성이다. 지금이 몇 차 혁명이냐에 대한 논쟁은 접자. 하지만 혁명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18세기 산업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늘만 쳐다보던 식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전환하며 ‘맬서스의 함정’을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는 점, 그리고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국가 간 대(大)분기(great divergence)가 일어났기에 혁명이라고 한 것이다.

말로는 혁명, 행동은 딴판

혁명은 기술이나 산업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등 정치적 전야제가 있었고, 자본가라는 혁명을 주도하는 새로운 계급 탄생을 동반했다. 리처드 넬슨의 해석을 차용하면 기술공간의 진화, 정치·법·제도의 진화, 새로운 기업가들에 의한 비즈니스의 진화 등이 어우러졌기에(이른바 ‘공진화’) 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혁명을 뒷받침한 사상도 빼놓을 수 없다. 산업혁명-자유(방임)주의 조합이 그렇다. 모든 경제활동이 국가의 인허가로 규제받았으면 혁명이 일어났겠나.

지금이 정말 4차 산업혁명이라면 행동도 그쪽으로 가야 맞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혁명 전야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포럼’을 출범시켰다는 국회를 보자. ‘혁신’이 아닌 ‘지대’를 추구하는(rent-seeking) 기득권 세력의 입법 로비 온상이 국회다. 국회가 4차 산업혁명을 생각한다면 특권을 내려놓고 정치혁명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발의하는 법안마다 온통 지대 추구를 부추기는 규제법 일색이면서 무슨 혁명 운운하는지.

‘아젠다 2050’이라는 모임에선 ‘로봇세’ 발상까지 내놨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기업 조세제도로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로봇, 인공지능(AI) 등에 과세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로봇, AI 등과 공존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교육·노동혁명을 고민해도 시원찮을 판에 실업을 이유로 4차 산업혁명에 세금 물릴 궁리부터 하는 국회다.

각자도생까지 막아서야

정부라고 다를 게 없다. 정부 주도 대학개혁을 고집하는 교육부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혁명이 밀려온다면서 대학과 ‘정원게임’이나 벌이며 그걸 개혁이라고 한다. 차라리 살 대학은 살게 대학에 개혁을 맡기든가. 교육부가 시킨 대로 했다가 모조리 망하면 그땐 누가 책임지나.

사업재편을 위한 기업활력제고법도 마찬가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법 시행을 앞두고 지원 대상인 과잉공급 판단기준을 마련했다고 한다. 멀쩡한 기업조차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혁명기에 과잉공급 운운하는 것 자체가 한가롭기 짝이 없다. 지원을 못해 주겠다면 망할 때 망하더라도 사업재편의 장벽 요인들이라도 제거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끝없이 반복되는 진화 알고리즘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혁명의 시대라면 ‘다양성(diversity)’을 극대화하는 것 말고 그 사회가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정부가 시킨 대로 ‘선택과 집중’을 했다간 몰살당하기 딱 좋다. 선택과 집중을 해도 그건 개인, 기업 등 혁신의 주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산업혁명이 자유주의를 필요로 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국가가 책임질 것도 아니라면 각자도생의 길이라도 터 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그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