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신규 해외투자 '올스톱'] "공기업 해외투자 최악 가정해 심사…'예타' 통과할 사업 하나도 없다"
공기업들의 해외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도입 후 줄줄이 무산되면서 예타 기준의 적정성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업 주체인 공기업은 물론이고 투자은행(IB)업계와 학계에서도 현행 예타의 몇몇 기준이 과도한 측면이 있는 만큼 제도 개선을 검토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장 보수적인 데이터로 평가”

무엇보다 공기업과 이들의 해외 사업을 자문하는 IB들은 “지난 몇 년간 예타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가정과 높은 할인율에 기반해 해외 사업의 사업성을 과도하게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주장했다.

기업은 신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방식으로 해당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회계법인·IB·기술자문업체·시장조사업체 등을 고용해 해당 사업에서 향후 20~30년에 걸쳐 발생할 현금흐름(수익성)을 추정하고 이를 일정한 할인율에 기초해 현재가치로 환산하는 방법(현금흐름할인법)을 활용한다.

현재가치가 투자액 대비 적정한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공장이나 발전소를 새로 지을 때도, 국내외 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런 사업성 추정엔 10~30년간 수많은 가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미래 매출부터 제품 판매단가, 비용, 시장점유율, 해당 시장의 성장률 등을 예상하고 그 근거까지 마련하려면 최악의 상황부터 최상의 시나리오까지 많게는 수백 개의 가정과 추정이 필요하다.

이는 공기업이 자체 추정한 사업성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별도 재무·기술자문사를 고용해 수행하는 예타가 추정한 사업성이 크게 차이 나는 첫 번째 이유다. 공기업과 IB업계에서는 “KDI가 추정하는 사업성은 대부분 가장 보수적인 시나리오를 가정해 매겨진다”고 주장했다.

한 관계자는 “공기업이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수십 개의 대규모 해외 사업 중 지금의 예타 기준을 통과할 사업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일각에선 과거 정부 주도로 추진한 무차별적인 해외 자원개발 진출 과정에서 대규모 손실을 본 데 따른 반작용으로 예타 기준을 과도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온다.

최근 한국전력이 예타의 부적격 판정으로 인수를 포기한 미국 풍력발전소 지분 100%에 대한 평가액이 좋은 예다. IB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자문사들의 도움을 얻어 해당 풍력발전소 주식의 적정 가치를 4억~4억5000만달러로 추정했지만 예타에서는 동일 지분을 2억달러 초반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수십 년간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바람 양과 품질, 이로 인한 발전량, 미래 전기가격을 놓고 예타가 가장 보수적인 가정을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해 말 입찰 때 한전과 인수 경쟁을 벌인 업체는 해당 지분 가치로 5억달러 이상을 제시했다”며 “이는 예타가 얼마나 공기업 해외 사업의 사업성을 낮게 평가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KDI 관계자는 “20~30년 뒤의 일을 모르는 상황에서 예측치에 차이가 있다고 무조건 과도하게 보수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할인율도 과도해”

전문가들은 현금흐름할인법을 통한 사업성 평가 때 적용되는 예타의 할인율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고 지적했다. 미래의 현금흐름을 동일하게 산정해도 할인율이 커질수록 현재가치(사업성)는 줄어든다.

공기업들은 저금리 상황 등을 감안할 때 해외 사업에 7~8%의 할인율만 적용해도 적정하다고 판단하지만 예타에서는 국가별로 많게는 12~15%를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젝트의 위험에다 투자 대상국의 국가위험 등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공기업이 해외에서 수행하는 발전 및 플랜트 건설 등의 사업은 고수익을 보장받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12~13%의 할인율을 적용해 사업성을 평가하면 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공기업이 신성장동력 확보 등을 위해 해외 투자를 할 때는 예타 때 적용되는 할인율을 지금보다 낮추는 방안을 강구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공기업 신인도에도 악영향

까다로운 예타 절차는 그 자체로 공기업의 해외 신인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처럼 해외 기업의 우선인수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포기하면 수십억~수백억원의 입찰보증금을 몰수당하는 등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향후 글로벌 M&A시장에서 신뢰가 훼손되는 무형의 손해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M&A시장에선 한국의 공기업은 예타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인수 후보 선정 때 뒤로 밀려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정부와 KDI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해 올해부터 해외 사업의 예타 기간을 단축하는 등 일부 제도를 바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추가적인 제도 개선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수 교수는 “신재생에너지 분야 등 국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기업의 해외 투자는 예타를 과감하게 면제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때는 정부가 자원개발을 중심으로 해외 사업을 적극 독려하다가 이제는 정반대로 해외 진출을 대부분 막아 공기업이 장기 글로벌 전략을 세우는 데 애를 먹고 있다”며 “공기업들이 유망한 해외 사업을 꾸준하게 펼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예타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열/이태훈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