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2700여년 역사상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다. 지난 19일 치러진 로마시장 선거 개표 결과 제1야당 오성(五星)운동(M5S)의 비르지니아 라지 후보(37)가 67.2% 득표율로, 32.8%를 얻은 집권 민주당(PD)의 로베르토 자케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기원전 8세기부터 도시가 형성된 로마는 그동안 집정관, 황제, 교황,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민선시장 등 수많은 통치자가 거쳐갔지만 이 가운데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현지언론들은 “라지의 승리는 이탈리아 정치와 여성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변호사에서 여성 시장으로

1978년 로마에서 태어난 라지는 로마3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라디오방송 PD인 남편과의 사이에 일곱 살 아들을 두고 있는 그의 정치입문 사연도 특이하다. 그는 “하루는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갔는데 인도가 없어 자동차 사이로 다녔다”며 “내 아들이 지금처럼 엉망인 로마에서 살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2011년 제1야당인 오성운동에 입당했다. 2013년부터는 로마시의원으로 일하며 교육과 환경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로마시장 선거 과정에서도 실생활과 관련한 공약을 내걸어 유권자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그는 거창한 정치 담론보다 버스 전용차로 건설과 자전거 도로 확충, 쓰레기 수거 문제 등 로마시민들이 평소 불편을 느끼던 분야를 파고들었다. 로마는 2014년 말 마피아와 시청 공무원 간 결탁 의혹이 불거지며 시민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라지는 개표 후 당선자 연설에서 “부패 스캔들로 얼룩진 로마를 법을 수호하는 투명한 도시로 복구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로마시장직을 발판 삼아 더 큰 정치적 인물로 성장할 가능성을 예견하는 시각도 있다. 피렌체시장을 거쳐 총리까지 오른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라지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지만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로마 시정이 부패한 핵심 원인으로 꼽히는 마피아 자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느냐가 첫 번째 관문이 될 전망이다. 전임 시장인 민주당 소속 마리노 이나치오도 부패 혐의로 옷을 벗었다.

바티칸에 대한 과세 여부도 민감한 문제로 꼽힌다. 라지는 바티칸이 소유한 상점 등의 미납 세금에 대해 적게는 2억5000만유로(약 3298억원), 많게는 4억유로를 추징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는 렌치 총리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2024년 로마 올림픽 유치에도 반대하고 있다.

제1야당 오성운동 전국적 입지 다져

라지의 당선으로 변방에 머물던 오성운동은 단숨에 전국적인 입지를 다지게 됐다. 오성운동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로마뿐 아니라 토리노에서도 시장을 당선시키면서 주요 도시 네 곳 중 두 곳을 차지했다. 토리노는 중도좌파 성향인 민주당의 아성으로 일컬어지던 곳이다.

로이터통신은 “민주당 본거지인 토리노에서의 패배가 렌치의 위상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 2018년으로 예정된 총선에서도 오성운동의 세력이 더 확장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오성운동은 정치풍자로 인기를 끈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깨끗한 정치’를 기치로 내걸고 2009년 창설한 정당이다. 대외적으로는 반(反)유럽연합(EU) 성향을 지니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에 적극적인 영국 독립당의 노선을 지지한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