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도진기 판사 "호기심이 글 쓰는 원동력…법의 한계 뛰어넘고 싶었다"
전업 작가라 해도 장편소설을 1년에 한 권 이상 내기는 쉽지 않다. 글을 쓰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본업이 따로 있고 밤이나 주말에 글을 쓰는 ‘투잡 작가’는 말할 나위가 없다. 업무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판사는 어떨까. ‘취미’로 글을 써서 1년에 한 권 이상 장편소설을 내는 판사가 있다. 문단에서 주는 상까지 받고 작품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등 평가도 좋다. 도진기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49·사법연수원 26기·사진) 얘기다.

도 부장판사는 내로라 하는 추리소설 작가다. 첫 작품을 낸 2010년 9월부터 지난달까지 장편 추리소설 여덟 편을 발표했다. 2014년 낸 《유다의 별》(황금가지)은 두 권짜리니까 권수로 치면 아홉 권이다. 미발표작도 세 편 있다.

6년도 안 된 기간에 이만큼 냈으니 글을 쓰는 속도가 상당하다고 할 만하다. 작품에 대한 평가도 좋다. 《유다의 별》은 2014년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한 한국추리문학대상을 받았다. 그가 쓴 장편 중 네 작품은 중국어로 번역됐다. 다른 네 편은 영화사 등이 판권을 사갔다.

도 부장판사는 “추리소설을 쓰는 건 전적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서나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글쓰기는 일상을 메마르지 않게 해주는 삶의 활력소”라며 “추리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라고 했다. 나중에 법복을 벗을 때가 와도 쓰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그를 지난 15일 서울 도봉동 서울북부지법 판사실에서 만났다.

“일본 추리소설과 한판 붙겠다”

도 부장판사가 추리소설 쓰기에 발을 들여놓은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호기심이 많았다.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무협지, 만화책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각종 사회활동에 발을 들였고 심지어 사이비 종교단체 회의에 참석한 적도 있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이후 10여년 동안 그는 평범한 일상에 파묻혀 지냈다. 판사로서 바쁘게 살다 보니 추리소설과도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법관이라는 ‘근엄하고 정제된’ 직업도 그의 기질적 호기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마흔 살이 넘어 그는 추리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일본 추리소설이 인지도가 높고 많이 수입된다. 그는 “추리소설에 관심을 두게 만든 건 일본 걸작들이지만 직접 쓰게 된 건 졸작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수입된 일본 작품을 읽다 보니 의외로 졸작도 많이 나온다는 걸 알게 돼 도전의식이 꿈틀댔습니다. ‘이런 소설도 출판되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일본 추리소설과 한판 붙겠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장편소설 《어둠의 변호사》(개정판 《붉은 집 살인사건》)와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쓴 뒤 처음으로 출판사에 건넸다. 다음날 출판사에서 정식 계약 제의가 들어왔다. 책이 나온 뒤 독자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드디어 이런 추리소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치켜세우는 독자도 있었어요. 용기를 얻어 계속 작품을 썼습니다. 셜록 홈스나 긴다이치 고스케 같은 인기 추리소설 캐릭터도 구상했고요.”

그런 구상 끝에 내놓은 게 ‘고진 변호사’와 ‘탐정 진구’라는 두 캐릭터. 그의 작품 여덟 편에는 이 두 인물이 계속 주인공으로 나온다. 추리소설 독자들은 그의 책을 ‘고진 시리즈’ 또는 ‘진구 시리즈’로 부르기 시작했다.

“TV, 인터넷, 골프 안 하니 글 쓸 시간 나더라”

그를 만나기 전부터 가장 궁금하던 질문을 꺼냈다. 글 쓸 시간을 어떻게 내는 걸까. 판사는 업무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직업이다. 야근이 잦아 다른 취미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도 부장판사는 “쉴 시간을 쪼개는 등 무리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다”며 “일 다 하고 쉴 거 다 쉬면서도 글 쓸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TV 시청, 인터넷 서핑, 골프 등을 일절 하지 않습니다. 퇴근 뒤나 주말은 거의 다른 작품을 읽거나 글감을 구상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죠.”

도진기 부장판사의 여덟번째 추리소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도진기 부장판사의 여덟번째 추리소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그는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마치 신이 내린 무당처럼 몇 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고 글을 쓴다고 한다. 그렇다고 방 안에서 상상력에만 의존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그에게는 원칙이 하나 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장소에 반드시 직접 가본다’는 것. 그래야 현장감 있는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신작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황금가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글을 쓰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간판이나 뒷골목 등은 모두 그가 러시아에서 본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소설은 묘사가 세밀하고 자신감이 있다. 법원 재판이 소설 속에 등장할 때도 있다. 직업이 법관인 만큼 그의 강점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검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공방과 심리 싸움을 자세하게 그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셜록 홈스 같은 캐릭터 만들겠다”

도 부장판사의 작품에는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소설에서 법의 허점을 지적하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을 날린다는 것이다. 그는 고진과 진구를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특히 고진은 변호사인데도 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섯 번째 작품인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이전에는 단 한 차례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

“법관으로 일하며 법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증거가 명백한데 법리적인 한계 때문에 유죄를 선고하지 못하거나 저지른 일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형을 선고할 때가 있거든요. 직업과는 별개로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소설을 통해 표출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과 진구를 셜록 홈스처럼 추리소설사에 오래 남는 캐릭터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서 벗어나 이런 큰 목표를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젊었을 때 품은 큰 꿈들은 나이가 들어 생계 문제에 치이다 보면 잊어버리기 십상인데 마흔 살 넘어 이런 꿈을 다시 가진 건 행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는 아직 추리소설 독자가 많지 않은데 대중적인 소설을 써서 이를 확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세계적인 수준의 해외 추리문학상에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바쁜' 판사의 자기절제
모임·골프·술 'NO', 주말 '폭풍 글쓰기'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평소 규칙적이고 절제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일 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에서 “글 쓰는 걸 직업으로 하려면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장편소설을 쓸 때는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장씩 쓴다고 밝혔다. 무라카미는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든지,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든지 하면 규칙이 깨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다”고 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난달 《제3인류》(열린책들) 한국어 번역본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매일 오전 8시부터 낮 12시30분까지를 글 쓰는 시간으로 정해 놨다”고 말했다. 휴가 때도 이 시간에는 예외 없이 글을 쓴다고 했다. 베르베르는 “소설을 쓰는 일은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며 “규칙적으로 써야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도진기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도 규칙적인 글쓰기 습관을 갖고 있다. 전업 작가가 아닌 만큼 매일 글을 쓰지는 못한다고 했다. 주중에 퇴근한 뒤 글감을 구상하고 주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책상에 앉는다. 자기관리를 위해 모임에 나가거나 골프를 치는 등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술도 잘 마시지 않는다. 도 부장판사는 “글을 쓰고 나면 탈진한 것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평소 체력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양병훈/마지혜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