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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CEO & Issue focus] 목타 리아디 리포그룹 CEO, 식민지시절 추방 당했던 화교 청년…"맡겨달라" 적자 시골은행 살려

입력 2016-06-16 16:55:23 | 수정 2016-06-27 13:57:55 | 지면정보 2016-06-17 B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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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국민기업 일군 87세 현역

반 네덜란드 시위 가담
10세 때 은행 고층건물 보고 "내 꿈은 이제부터 은행가"
시위 가담했다 3년간 유랑 생활

작은 지역 은행서 꿈 키우다
"책임자로 임명해달라" 소유주 설득, 1년 만에 실적 호전되며 유명세
인니 최대그룹 살림서 스카우트

리포그룹 창업으로 재산 23억불
은행으로 시작해 부동산으로 확장, 유통·미디어·의료 등 다양한 사업군

장학금 기부·인니 독립운동 활동
평판 좋아 반중 폭동도 비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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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국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업이 있다. 리포(Lippo)그룹이다. 은행, 주택, 소매유통, 미디어, 교육, 헬스케어, 통신, 전자상거래, 병원, 묘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군을 거느리고 있는 리포그룹은 인도네시아 국민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스며들어 있다. 리포그룹 창업자 겸 회장은 목타 리아디(Mochtar Riady). 올해로 87세의 고령이지만 여전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현역이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그는 총자산 110억달러로 추산되는 그룹을 일궈냈다. 리아디의 개인 재산도 지난해 포브스 집계 기준 23억달러에 이른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0대 부자에 속한다.

은행가 꿈꿨던 식민지 소년

목타 리아디는 1929년 동(東)자바 말랑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자 표기로 이문정(李文正).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화교 출신이다. 인도네시아 전통 문양의 염색 천 ‘바틱(batik)’ 거래일을 하던 가계의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상태에 있던 당시 인도네시아 현지인의 삶은 대체로 궁핍했다.

리아디는 10살 때 평생의 업으로 이어질 결심을 했다. 은행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동기는 단순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늘 지나쳤던 네덜란드계 대형 은행(NHB)이 들어선 고층 빌딩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경외감을 느낀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그는 반식민주의자로 활동했다. ‘동자바 해외중국학생연합’ 회장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했던 게릴라를 지원했고 반(反)네덜란드 시위에도 적극 가담했다. 그 무렵 인도네시아는 2차대전 기간 일본군이 네덜란드에 승리하면서 잠시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가 1945년 일본 패망 후 다시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놓이는 등 격변기였다.

1947년 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된 그는 중국 난징으로 추방됐다. 그는 난징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중국도 안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간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포되자 이듬해 리아디는 3년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손대는 기업마다 키운 미다스의 손

리아디는 동자바의 젬버라는 작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은행 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모색했지만 하루라도 당장 생계를 도모하라는 부친의 반대에 부딪혔다. 1951년 결혼한 그는 친척이 소유했던 작은 자전거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장사에 수완을 보인 그는 이 점포를 3년 만에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로 키워냈다. 은행가가 되겠다는 오랜 꿈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54년 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카르타로 떠났다.

은행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는 우선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이 시기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자카르타에서 비즈니스 인맥을 구축하는 토대가 됐다. 6개월 뒤 그는 작은 쇼핑사업을 시작했다. 은행가로의 삶이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지인으로부터 재정적으로 심각한 상태였던 ‘끄막무란’이라는 이름의 작은 지역은행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였다. 그는 이 은행 소유주인 앤디 가파를 찾아가 자신을 은행 책임자로 임명해달라고 설득했다. 끝내 승낙을 받아낸 그는 은행업의 기본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1년 만에 이 은행 실적이 호전되면서 리아디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4년 리아디는 ‘부아나 은행’으로 옮겼다. 이 은행도 더 탄탄한 금융회사로 탈바꿈했다. 점점 은행가로서 명성을 쌓은 그는 1971년 ‘파닌 은행’의 경영자로 갈아탔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 다른 3개 은행을 합병하는 데 성공하면서 파닌 은행을 인도네시아 10대 은행으로 키웠다.

인도네시아 최대 그룹 살림(Salim)의 창업자 리엠 시오에 리옹이 그를 스카우트한 건 이 무렵이다. 리아디는 곧 리옹의 오른팔이 됐다. 살림그룹 산하 BCA 은행의 책임을 맡는 임무가 그에게 부여됐다. BCA 지분의 17.5%가 리아디 몫으로 돌아왔다. 리아디가 거쳐간 기업이 늘 그래왔듯 BCA 은행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가 BCA에 왔을 때 총자산은 128억루피아였으나, 1990년 BCA 은행의 자산은 5조루피아로 불어났다. 그에게 ‘은행 마케팅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던 까닭이다.

부동산 개발 강자로 탈바꿈

리옹 살림그룹 회장은 30여년간 독재자로 군림한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웠다. 수하르토와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었던 리아디는 결국 1990년 그룹을 떠나 자신의 사업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리포그룹이 본격적인 출범을 하게 된 시기다.

리포그룹은 인도네시아는 물론 중국, 싱가포르, 홍콩 등 동남아 일대를 무대로 50개 자회사와 5만명 이상의 직원을 두고 있다. 그룹의 주력사업은 원래 리포은행이었지만 지금은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인도네시아 경기침체기에 대출을 갚지 못한 많은 고객의 담보 부동산 물건들을 수용한 것이 계기였다. 서(西)자카르타에 건설한 계획도시 ‘카라와치’는 리포그룹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매유통에도 강점이 있는 리포그룹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카르푸를 실적부진으로 철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인자한 품성을 갖고 있는 리아디는 기부활동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대학생을 위해 500만달러를 싱가포르 경영대에 기부했다.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인도네시아 오지에는 학교 1000개를 설립하는 목표를 세웠다. 인적자원 육성이 인도네시아를 발전시킬 핵심 요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중국인 태생 화교 출신이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는 그는 인도네시아 안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다. 1998년 반(反)중국인 폭동이 벌어져 부유한 중국인들이 해외로 도망갔을 때도 많은 인도네시아인이 리아디만은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아디는 최근 전자상거래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올해 초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년간 모든 경제는 모터발전기와 관련이 있지만 오늘날은 디지털과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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